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Oct 18. 2023

태평하게 삽니다, 오늘도

여름 감기가 단단히 걸렸다. 몇 년에 한 번씩 약이 듣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앓는 주기가 찾아왔다. 무더위가 절정인 8월에 한기가 들어서 전기장판을 틀고 식은땀을 흘렸다. 눈에 열이 차올라 물수건을 몇 번이나 갈았다. 물수건으로 식혀주지 않으면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너무 뜨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열이 내리니 공포의 기침이 시작됐다. 내 기침은 어릴 때부터 지독하기로 유명했다. 창자를 끊어낼 듯한 기침 소리에 뱃가죽이 당겨서 고통스러웠다. 밤인지 낮인지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하고 며칠을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다.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던가. 

자는 둥 마는 둥 몽롱한 상태에서 ‘죽음’을 떠올렸다. ‘죽고 싶다’가 아니라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죽을 만큼 아팠던 건 아니지만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 해도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만약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지도 못했고 이룬 것도 없는데 이대로 죽는다고? 너무 억울해! 말도 안 돼! 내 삶이 이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고 인생의 굴곡과 함께 공부할수록 세상에 ‘절대 안 된다’라는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비록 내가 원하는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부자도 아니고 해외여행도 못 갔지만, 오늘 죽는다면? 억울한 감정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를 둘러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안에 깃든 근본적인 불안은 잠식시키지 못했다. 이 불안은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폭탄 돌리기 하듯 불안을 마구 투척했다. 


남편은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나는 그의 서투름을 지적하고 비난했다. 참다못한 그는 “내가 어떻게 해도 너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날 선 말을 내뱉었다. 홧김에 한 말이라도 너무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격렬한 개싸움으로 변질하곤 했다.   

   

남편의 말대로 나의 근본적인 불안은 상대방이 해소해 줄 수 없다는 걸 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순간 갈등이 생긴다. 헛된 기대를 놓아버리면 불안에서 벗어나고 관계도 더 좋아진다. 한동안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과 관심을 놓아버리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아직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지만 아프고 나니 다 부질없어졌다. 내가 아프든 불안하든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 칠 때도 시간은 유유히 흐른다. 시간에 따라 나도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불안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심해진다. 불안과 초조, 짜증, 비난은 늘 세트로 함께 온다. 그런 감정을 억지로 아닌 척할 필요는 없다. 한 번 부정하면 다음에는 더 크게 불어나서 나를 덮칠 수 있으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당장 그 불안을 어찌하지 못하더라도 지나갈 때까지 시간의 흐름에 내맡긴다. 

이 또한 영원하지 않을 걸 아니까 두려워도 견딜 힘이 생긴다. 지나고 보면 최고의 날도 최악의 날도 없다. 


태평하게 산다. 오늘도. 

이전 03화 앞자리가 바뀌고 경력 단절녀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