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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Oct 18. 2023

석사 논문을 박사처럼 쓰는 비효율에 대하여

대학원에 입학할 때만 해도 포부가 컸다. 

막상 시작한 대학원 생활은 4학기 중 3학기 내내 ‘대체 이 공부를 왜 하는가? 이대로 괜찮은가?’ 따위의 고민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3학기가 끝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4학기에는 개강하자마자 논문 1차 심사가 있다. 초고를 완성할 시간은 겨울 방학 단 두 달. 하루빨리 논문 주제를 확정하고 뭐라도 써야 했다. 석사 논문은 선택인데 입학할 때부터 논문을 쓰겠다고 한 과거의 내 입을 막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지도교수님은 기특하게 여기며 도와주셨다. 리포트를 쓸 때도 항상 논문과 연계해서 쓸 수 있도록 피드백을 주셨고, 연구 주제와 관련된 책이나 논문을 틈날 때마다 소개해 주셨다. 나보다 더 내 논문에 진심인 교수님께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말하기 민망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틈틈이 끼적인 메모를 아무리 뒤져봐도 논문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난감했다. 프로이트 전집을 뒤적이며 초조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드디어 이거다 싶은 주제를 만났다. 곧장 그 주제에 빠져들었다. 어설프게나마 논문 초고를 작성해 매주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았다. 줌 미팅이나 카톡, 메일 뭐든 생각날 때마다 질문했다. 논문 심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석사 둘, 박사 둘이었다. 나만큼 열성적으로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나만 부족한가? 내가 제일 공부 이력이 짧아서 그런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교수님은 나 같은 논문 초짜에게 아주 훌륭한 러닝메이트였다. 늘 격려해 주셨고,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막힌 부분을 기가 막히게 콕 짚어 냈다. 그러나 스스로 하지 않으면 먼저 떠먹여 주지는 않는다. 교수님의 조언에 시큰둥해하거나 별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두 번 말하지 않았다.     

 

4학기에는 수업은 뒷전이고 논문에만 매달렸다. 1차 심사 뒤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논문 심사는 등급제가 아니고 합격, 불합격만 있어서 내 논문 수준은 심사 위원의 평가를 통해서만 가늠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학술적으로 우수한 논문”이라는 후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도교수님의 열정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박사 논문을 쓰는 줄 착각하는 듯해 “석사 논문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라며 투정 어린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석사, 박사 논문이 따로 있지 않다”라며, “박사 논문을 능가하는 석사 논문도 많다”라고, 예의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하셨다. 참으로 한결같은 분이다.     

 

최종 심사가 끝나고 뒤풀이에서 심사 위원이던 교수님이 “박사 과정에서도 다루기 힘든 주제를 어떻게 석사에서 다룰 생각을 했냐”라고 하길래 어쩐지 갈수록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더니만 우리 지도교수님의 열정에 낚여버렸다. 


한 해의 절반을 논문에 투자했다. 논문은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을 몇 달씩이나 작업한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긴 호흡의 글을 쓰고 나니 장편 소설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완성하고 나니 뭔가 큰 고개를 넘은 듯한 성취감이 생겼다.    

  

만약 석사 논문을 쓰지 않고 졸업했다면 정말 남는 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박사 진학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최대 10시간을 넘게 책상에 앉아 있느라 허리 디스크가 도져 한의원의 침을 맞으며 버텼다. 수시로 당이 딸려서 사탕과 초콜릿을 달고 살았다. 그 덕에 뱃살뿐만 아니라 실력도 늘었다고 믿고 싶다. 책상 위에 잘 보이는 곳에 논문을 진열했다. 

게을러 질 때마다 개고생한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참 비효율적으로 석사 논문을 쓰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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