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 없는 확신의 햄김치볶음밥
해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연말이 다가올수록 우울하다.
우울함의 정도는 해를 갓 넘기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거의 1~2월까지 정신을 못 차린다고 봐야 한다. 한 해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까지만 딱 좋다. 연말 특유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유종의 미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싫다.
5, 4, 3, 2, 1!
카운트다운을 하고 제야의 종을 치면 해가 바뀌듯 내 삶도 그렇게 쉽게 달라질 수 있다면 찬바람 맞으며 수많은 인파에 섞여 얼마든지 목이 터져라 외치겠지.
같은 의미로 해돋이를 보거나 새해 목표를 세우는 일 따위도 당연히 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올해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상은 나와 반대로 가고 있다. 지난해에 세운 목표도 제대로 지키긴커녕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새해라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희망차게 한 해를 시작하라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남들이 다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공룡이와 한 해를 돌아보며 대체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만, 올 초 기억이 흐릿해졌다고 “뭐, 올해도 나쁘진 않았어”라는 식의 대충 뭉뚱그린 자기 위안을 혐오한다.
연말이 되면 헤어진 연인에게 미련을 가지는 것보다 더 구질구질해진다. 나만 실패한 것 같다. 작년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해로 환승하라고?
어떻게 그래?
와, 이렇게 쓰고 보니 전형적인 사회부적응자의 뻔한 신세한탄 같다. 너무 한심해서 나조차 들어주기 힘들 지경이다. 연말 우울증은 다음 해 1월 내 생일을 기점으로 ‘어쩔 수 없지.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이제 좀 정신 차리자’로 바뀐다. 마치 분노의 5단계처럼 수용의 단계에 들어선다.
그렇다고 바로 확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구정이 지나야 진정한 새해지!’ 하면서 2월까지 밍그적 대다가 3월이 되면 대학원도 개강하고, 봄기운이 만개하면 이미 와 있는 새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지난 몇 년 간 이런 나의 한심한 작태를 지켜보던 선의의 피해자인 공룡이가 보다 못해 한 소리한다.
공룡 : 넌 남한테 엄격하고, 자신한테는 더 엄격해.
나 : 내가 틀린 말 했어? 뭐 잘한 게 있어야 칭찬을 하든가 할거 아냐?!
이번에는 유독 심한 연말, 연초 우울증에 시달렸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힘들다. 왜 이런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공룡이 말대로 자신한테 너무 엄격해서 “그만하면 잘했다”라고 칭찬할 일도 지나치게 인색하게 구는 걸까? 스스로 평가에 인색하면 남이 하는 칭찬이라도 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다.
얼마 전에 지도 교수님과 면담을 하면서 “제가 연구자로서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평가를 좀 해달라”라고 요청드렸다. 교수님은 “잘하고 있다”라고 간결하게 칭찬을 하셨다.
편집증 환자처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교수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냐?”라고 의심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조목조목 말씀해 주시죠.”라고 차마 따지지는 못하고 계속 비슷한 말만 맴돌았다.
공룡이에게도 칭찬보다는 지적질이 더 익숙하다.
칭찬을 하긴 하는데 가벼운 지적질 10번에 묵직한 칭찬 한 번쯤 해봐야 티도 안 난다. 칭찬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인색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어릴 때부터 칭찬에 목말랐다. 부모님은 오빠에 비해 덜 혼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칭찬을 하지도 않았다. 집에서 못 받은 칭찬을 학교에서 받기 위해 말 잘 듣는 얌전한 학생이 되었다. 문제를 일으키진 않지만 대단히 뛰어나지도 않은 한마디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기에 오히려 선생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는 직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커리어를 위해서라면 워라밸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건만, 돌아오는 건 위장장애와 불면증 뿐.
칭찬과 인정은 그들만의 리그라고 치부하고, 대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했다.
부모님도 칭찬을 못 받고 자라서 그런 거라고, 서툴러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려고 했는데 손주한테 하는 걸 보니 그새 칭찬을 배웠는지 자식을 대할 때와 180도 달랐다.
나도 (원하는 만큼) 칭찬받지 못했는데 에라이 나도 남에게 주지 않으리라! 하는 못된 심보로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다.
공룡이는 나보단 칭찬을 받고 산 것 같지만 그만큼 간섭과 통제를 배로 받아서 칭찬을 어색해한다. 어쩌다 내가 칭찬하면 무슨 목적이 있는지 의심부터 한다. 칭찬에 인색한 애가 웬일로 칭찬하는지 뭔가 시커먼 음모가 숨어있다고 여긴다. 딴에는 용기를 북돋워준다고 했는데 공룡이의 반응이 떨떠름하면 역시 괜히 했다 싶다.
나 : 기껏 칭찬해 줬더니 반응이 왜 그래?
공룡 : 무슨 칭찬이 적선도 아니고 인심 쓰냐?
늘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이성적으로 시작하는 듯하다가 급발진해서 ‘칭찬 배틀’로 이어졌다. 서로를 칭찬해 주는 따스한 칭찬 배틀 말고, “너부터 칭찬해 봐!”라는 식의 두고 보자 칭찬 배틀말이다.
항상 이런 식으로 몰아가진 않지만 대화의 맥락이 이 모양이니 차라리 극사실주의 대화가 속편 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말 우울증에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나를 보면 공룡이는 “차라리 혼을 내라”라고 다그친다.
나 : 미안해. 사실 자기는 잘하고 있어. 내가 칭찬을 할 줄 몰라서 그래. 제대로 받은 적이 있어야 말이지.
공룡 : 거짓말하지 마. 칭찬을 해도 안 믿잖아.
나 : (속으로) 예리한 놈…
공룡이가 대화에 서투르고 눈치가 없는 편이지만 귀신같이 예리한 촉을 뽐낼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칭찬 베틀이고 뭐고 말없이 후퇴하는 게 최선이다.
한번 의욕을 잃으면 식욕이고 뭐고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다. 공룡이가 출근하는 날이면 나는 안 먹어도 출근 밥상은 꼭 차려준다. 다행히 휴일이다. 전에 요리금지령이 내려진 후로 휴일에는 끼니를 챙기지 않는다.
요리금지령 이후로 공룡이는 여건이 될 때마다 ‘용주부’로 변신했다.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는 식의 의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밥상을 차려주지 않아도 이해했다. 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
내가 일방적으로 화가 나서 침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집을 나가는 건 안된다) 조금 있다 공룡이가 와서 풀어주곤 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괘씸했다. 참다못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 굳이! 다가가 따진다.
나 : 왜 안 와?
공룡 : 혼자 있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나 : 그건 맞지만! 내 맘이 아무리 그래도 자기는 날 보러 와야지!
공룡 : 딴에는 배려한 건데…
나 : 배려랍시고 날 내팽개치지 말고, 표현을 해야지!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평소에 누구보다 논리적인 척, 이성적인 척하면서 꼭 불리할 때는 유치하게 떼를 쓴다. 아직까지는 이게 먹혀서(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이좋게 밥을 먹으면서 든든하게 마무리되곤 한다.
혼자라면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든 잠수를 타든 상관없지만 함께 사는 사람에게 못할 짓이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예전보다 회복탄력성을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무엇보다 내가 밥을 안 먹으면 공룡이가 아무리 음식을 좋아해도 혼자 먹는 걸 싫어해서 같이 굶는다.
그래, 지금 공허한 게 아니라 속이 허한 거야.
본의 아니게 16시간 넘게 간헐적 단식을 하는 바람에 배꼽 신호가 우렁차다. 내가 배고프다는 신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공룡이가 얼른 간단하게 요리할 궁리를 한다. 집에 있는 재료로 맛이 보장되면서 후딱 할 수 있는 걸로는 볶음밥 만한 게 없다.
마침 전기밥솥에 24시간 가까이 묵힌 밥이 있으니 처리하기에 딱이다.
잠시 뒤 공룡이가 밥 먹으라고 부른다. 식탁 위에 계란 이불을 덮은 햄김치볶음밥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피보다 진한(?) 케첩으로 그린 하트가 확신의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나 : 와! 정말 돈 받고 팔아도 되겠다!
공룡 : (입술을 씰룩이며) 그래?
아무리 칭찬에 인색한 나라도 자연스럽게 칭찬이 흘러나온다.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은 아낀다고 아껴지는 게 아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니어도 진심은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한 그릇 가득 눌러 담아 넘치도록 칭찬이 흘러나온다.
둘 사이에 수저가 오가는 소리만 들릴 뿐 식사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대화가 없다. 칭찬이 어색한 틈을 햄김치볶음밥이 완벽하게 메꿨다.
맛은?
말해 뭐 해?
확신의 햄김치볶음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