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Feb 11. 2024

생일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소고기된장찌개&구이

사회통념상 정해진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구정 연휴인데 크게 의미 없다.

찾아봬야 할 친척도, 지내야 할 차례도 없거나 며느리로서의 의무도 없으니까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살면서 나를 위한 일보다 당연히 ‘해야 한다’라고 규정지어진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자신을 옥죄던 일을 그만두기로 했을 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간단하다.

그냥 욕먹을 각오만 하면 된다.


그러려면 먼저 인간관계를 어디까지 정리하고 싶은지부터 정해야 한다.


명절에 인사하기,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 하기, 어버이날 챙기기, 생신 챙기기, 김장철 챙기기, 얼굴도 모르는 분 제사 챙기기, 알리가 없고 앞으로도 알 필요 없는 양가 친척의 사돈의 팔촌 결혼식 챙기기(단, 장례식은 신중해야 한다)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내키지 않아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번거로움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소위 ‘기념일’이라는 행사를 완전히 비켜가기는 어렵다.

빼빼로데이라고 의례적으로 빼빼로를 돌리는 문화가 있는 직장에 다닌 적이 있는데 정말 불편했다. 받고 싶지도 않은데 도로 가져가라고 할 수도 없고, 받았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는 정말 최적의 돈 쓸 구실이다.


크리스마스는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혼자 즐기는 것뿐, 딱히 챙기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럼, 나란 인간은 참으로 삭막하게 사는 것인가? 인생을 살면서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다.

대중적인 기념일과 상관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나만 특별한 날은 챙긴다.


예를 들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나 학위 수여식 같은 날.


생일도 내가 원해서 생긴 게 아니니 앞뒤가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태어난 건 내 맘대로 못해도 살아가는 건 내가 정할 수 있다.(라고 믿는다)

20대에는 당연히 친구들과 생일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챙겨주기 바빴다. 그때는 내 생일은 남이 챙겨줘야 하는 날인줄 알았다.


굳이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내 생일은 내가 챙긴다. 거창하게 파티를 하거나 케이크에 초를 꽂지 않아도 그날만큼은 나의 날로 정해 최대한 나를 위한 뭔가를 한다.

의례적인 생이 축하 메시지도 받기 싫어서 카톡 프로필에 생일이 안 보이게 설정해 놨다. 물론 남의 생일 표시도 안 보이게 해 놨다.


진짜 생일을 챙겨주는 사이는 그런 걸 설정해 놓지 않아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연락이 온다. 순수한 축하의 말 한마디가 어떤 선물보다 값지다.




부모님과 살 때는 생일상이라도 받아먹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다.

나의 남편, 용주부는 내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번 생일은 평일이라서 제 날짜에 챙기기 어려웠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되지 않았다. 억지로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다고 재차 말렸다.


나 : 생일을 꼭 당일에만 챙겨야 해? 설마 오늘만 잘 넘기면 된다는 생각은 아니지?
공룡 : …. 그럴 리가.

나 : 자, 너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어. 언제로 할래?


내 생일은 음력으로 하면 12월, 양력으로 하면 1월이고 주민등록상 생일은 2월이다. 꼭 제 날짜에 챙기고 싶으면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혼자 양력 생일을 잘 보냈지만, 생일상을 차려 준다면 굳이! 마다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때마침, 친오빠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한우 세트를 보내줬다. 좋은 식재료가 생기자 내 생일상에 더욱 의욕을 보이던 공룡이가 생일이 있던 주말에 소고기된장찌개와 등심 구이를 차려주었다. 된장찌개는 *순이네라고 된장찌개만으로 건물을 세운 식당의 비법으로 만들었다는데 마치 술을 먹고 난 뒤 입가심으로 먹어야 할 맛이었다.



밥을 말아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한 그릇 뚝딱하고, 더 먹고 싶었는데 배가 불러서 못 먹는 게 아쉬웠다.

소고기 구이야 뭐, 두말하면 입에서 녹지.


한우를 제공해준 오빠에게 용주부의 생일상을 보내니 하는 말,


친오빠 : 너는 요리 못하냐?
나 : 어휴, 꼰대!


어째서 아내가 남편의 생일상을 차려주는 건 당연한거고, 못해주면 욕 먹을 혹은 시가에서 한 소리할 일이 되고, 남편이 아내의 생일상을 차려주면 미담이 되는가?

그래봤자 내가 받아 먹을 밥상이 많을까? 해 줄 밥상이 많을까?


뭐가 됐든 부부 사이가 그렇게 딱 떨어지게 계산적으로 주고 받는 사이라면 더 많은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혼전문 변호사가 나와 하는 말이 ‘엑셀’로 서로 쓴 내역을 정리해서 가사 노동 시간도 칼 같이 계산한다고 했다.

부부 생활이 카드 명세처럼 딱딱 정확하게 계산되서 나온다면 누가 더 손해일까?

아무리 공정하게(애초에 이 말도 비합리적이지만) 계산해도 마음 속 생채기는 남는다.


가끔씩 용주부로 변신해서 맛있는 음식을 하고, 함께 먹는 시간을 최고로 행복하게 여기는 마음씀이 고마울 뿐이다.

이런 날이 있으면 마음에 불만이 있던 것들이 어느새 사라진다. 다시 또 쌓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이 즐겁다면 변태인가?


늘 먹던 밥상인데 해 주는 사람의 정성과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된장찌개가 특별한 생일상이 된다.

내 생일이 제일 먼저 있으니 잘해주어야 자신의 생일상도 받아먹을 수 있다고 계산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믿는다)


생일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사실, 생일이야 언제든 받으면 어떤가?

남들이 축하해 주기 좋은 날로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남들에게 축하를 받아야지만 생일이 의미 있는 건 아니다.

원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매일매일을 생일로 정해 축하할 수도 있다.


나이 들수록 생일을 뭐 하러 챙기나? 늙은 게 뭐 자랑이라고.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지인도 많았다.

생일상을 받는 유통기한도, 생일을 챙길 수 있는 나이도 정해져 있나?

내 생일이라는데, 누가 뭐래?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날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

그날이 생일이라면 참 좋겠다.







이전 03화 칭찬에 인색한 여자, 칭찬이 어색한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