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즙 그대로 무수분 수육
나에겐 오랜 지병이 있다.
최초의 진단은 20여 년 전, 길거리에서 재미 삼아 본 점쟁이 할머니가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驛馬煞 역마살은 사전적 의미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는 운명"을 뜻한다.
그 점쟁이 할머니는 특이하게 새장의 작은 새가 부리로 물어다 주는 쪽지로 점을 봤다. 친구가 용하다길래 호기심에 가 봤는데 쌀이나 동전을 던져서 점을 보는 것도 아니고 새가 물어다 주는 쪽지라니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때까지 부산 토박이로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어서 괜히 돈만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점쟁이 새 할머니의 말은 마치 예언과 같았다. 환경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던 20대, 30대에도 지리적인 이동만 하지 않았을 뿐 직업적인 이동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옮겼다. 비슷한 직종의 직장을 옮기는 건 기본이고, 남들은 하기 꺼려할 직종을 옮기는 일도 허다했다.
30대 중반, 예기치 않게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 역마살이 극대화된다. 지금까지의 이직 활동은 몸풀기였다는 듯 본격적인 프로이직러가 되었다.
정말 마가 낀 건지 한 곳에 가만히 있으면 두드러기라도 나는 건지 좀처럼 정착을 하지 못했다. 직장이든 집이든 한 곳에 일 년 이상 있으면 좀이 쑤셨다. 장소만 옮기는 게 아니라 직장 직업 인간관계 심지어 결혼까지 뭐 하나 가만히 두는 법이 없었다.
이쯤 되면 역마살이 아니라 ㅈㄹ병이다. 나는 오직 성공만 보고 달렸고, 극도로 불안했다. 내가 노력만 하면, 조금만 더 최선을 다하면 내 인생을,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안정을 원하면서 정착을 두려워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인간관계도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 모든 방황의 중심에는 단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졌다.
나는 누구인가?
답을 찾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험난 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던 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서서히 직업도 결혼도 나의 가치관도 모두 바뀌었다.
마흔 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ㅈㄹ병의 패턴도 바뀌었다. 직장을 옮기다 못해 아예 관두고 프리랜서가 되어 학업과 병행하니까 대학원을 관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인간관계는 정리할 사람은 다 정리되고 거의 고립되다시피 했지만 편안했다. 그야말로 태평한 나날이었다.
공룡이는 나의 ㅈㄹ병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옮길 직장이 없어지고 재택근무를 하니까 열받으면 자동적으로 집을 나갔다. 조금만 화가 나도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공룡이와 싸우고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일단 맨몸으로라도 문 밖을 나서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나 비나 눈이 오는 날에 싸워도 가출 패키지(노트북, 아이패드, 핸드폰, 충전기)를 챙겨서 집을 나가야 했다.
공룡이가 어디 가냐고 물어봐도 할 말은 없다. 어디 가는지 나도 모르니까. 목적지 따위 중요하지 않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번 화가 나면 앞뒤 물불을 안 가리는 나의 성격을 잘 아는 공룡이는 내가 가출 패키지를 쌀 조짐이 보이면 얼른 핸드폰이나 노트북부터 숨겼다. 장신의 키를 이용해서 단신인 내가 찾기 힘든 높은 곳에 숨겼다.
이런 패턴이 몇 번 반복되자 공룡이가 합의(?)를 제안했다.
공룡 : 너의 패턴을 관찰해 봤을 때 역마살의 최대 제한 시간이 72시간이야.
앞으로는 무조건 72시간 내에 어디든 데려가 줄게.
그러니까 함부로 집 나가지 마.
나 : 좋아. 너도 화난다고 내 말 무시하는 거 하지 마.
혼자 있을 시간은 최대 24시간 주겠어.
사람마다 화가 났을 때 감정을 해소하는 시간이 다르다. 공룡이는 내가 역마살이 ㅈㄹ병으로 심해지기 전 72시간 내에 바람을 쐬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항상 지킬 수는 없겠지만 마음씀이 고마웠다. 나도 화가 나면 최대 24시간은 그를 내버려 두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이었다.
한동안 72 / 24시간 규칙으로 평화로웠다. 한. 동. 안. 말이다.
우려했던 대로 이 규칙이 항상 지켜질 수는 없었다.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갔다. 공룡이가 하는 일이 바뀌고 생활리듬도 불규칙하게 되면서 지키지 못하는 날이 자꾸 쌓였다.
그날도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항상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결국 나는 참다못해 집을 나갔다. 나가봤자 동네 한 바퀴지만 어쨌든 평화 합의안은 깨졌다. 공룡이도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없이 출근했다.
흥! 24시간, 아니 48시간이 지나도 먼저 말 거나 봐라!
이번에는 다짐을 단단히 하며 각오를 다졌다.
공룡이가 요리에 눈을 뜨게 되면서 휴일에 뭘 해먹을 지 궁리하는 일이 우리의 최대 고민이었다. 싸우기 전에 주말에 수육을 해 먹기로 정해놓고 재료를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싸우고 난 다음 날은 휴일이었다. 여전히 대화를 하지 않았고, 집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헤드폰을 끼고 건들지 말라는 분위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무시했다. 이참에 간헐적 단식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버텼다.
잠시 뒤 공룡이가 잠에서 깨더니 말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장을 봐뒀던 재료로 뭔가를 하는 모양새였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나의 굳건한 의지를 배신하게 했다. 괜히 볼 일이 있는 척 주방을 어슬렁 거렸다.
공룡이가 기다렸다는 듯 갓 삶아진 수육을 한 조각 잘라 나에게 내밀었다. 24시간 만에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대화는 없었다. 공룡이가 김이 펄펄 나는 솥에서 맛보기로 조금 잘라낸 수육 한 점을 한 손에 들고 내 입으로 내밀었다. 자동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역시 인간의 자유 의지란 참 하찮다.
으음~!
나도 모르게 하이톤의 콧소리가 나왔다. 지금까지 먹어본 수육과 질이 달랐다. 훨씬 탱탱한데 부드러워서 살살 녹았다.
나의 진실의 미간을 본 공룡이는 흡족한 듯 "조금만 더 끓이면 된다"라며 곧 밥을 먹을 것을 예고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김치를 꺼내고, 수저를 놓고 마지막으로 식탁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렸다.
요리하는 과정의 사진은 싸울 때 말고 그 다음에 한번 더 해 먹을 때 찍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가까이 가서 사진까지 찍을 정도로 속없이 굴기는 싫었다.
얼마 뒤 공룡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을 한 접시 내왔다. 물 없이 야채의 수분만으로 익힌 무수분 수육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파무침도 같이 곁들였다.
도저히 눈앞의 수육을 보고 사진을 안 찍을 수가 없네.
역시 고기는 언제나 옳다.
무수분으로 하니까 수육을 삶는 과정에서 육즙이 덜 빠져나가서 고기가 탱글탱글 탄력이 넘쳤다. 씹는 순간 질기지도 않아서 고기인데 사르르 녹았다. 갓 해서 바로 먹으니까 한 접시 금방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수육을 먹었다. 쌈 싸는 걸 귀찮아하는 공룡이에게 상추를 건넸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자연스럽게 설거지는 내가 하는 걸로 화해를 했다. 이미 고기를 한 점 먹을 때부터 화해는 끝났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점 수육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공룡이에게 음식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비록 말재주가 없고, 대화가 서툴러서 맨날 욕먹어도 그의 사랑을 의심한 적은 없다.(아직까지는).
ㅈㄹ병이 도진 지 72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번에는 외출하지 않아도 (수육으로) 마음이 채워졌다.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