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피 Oct 13. 2024

극T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는 방식

일주일 밑반찬

여름을 버티며 쓴 글이 심사에 떨어졌다. 


"첫 작이라 기대 안 해"라는 말은 결과를 듣자마자 헛소리였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뭔지 있었다.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여름 무더위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대학원까지 관두고 오롯이 나로 살면서 쓴 글인데 내 선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너무 확대해석 하는 것 아니냐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일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앞으로 상업작가로 살면서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할 텐데 그에 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필 그 소식을 남편(용주부)이 출근 전에 들어서 둘 다 당황스러웠다. 

한 달 넘게 심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남편은 "심사가 나오는 날 만약에 불합격하면 어디 좀 있다가 올게"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자 어쩔 줄을 몰랐다. 


하필 이날은 몇 년간 미루었던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물 한 모금도 못 마시지 못하니 가슴이 답답한 채로 병원에 갔다. 날 것의 내 몸을 낯선 이에게 내보이는 불쾌한 경험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데 혈압이 너무 높았다. 


조금 있다가 다시 재 보면 괜찮겠지 하고 세 번을 쟀는데 왠 걸? 잴 때마다 점점 더 높아지는 게 아닌가?

이미 의사와 면담을 끝내고 간단한 약 처방전도 받았는데 다시 호출. 의사가 직접 혈압을 재고(그래도 높게 나왔다), 심전도 검사까지 한 끝에 혈압약을 처방받았다.  


아... 오늘날을 잘못 잡았나?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 심사 떨어졌어!"라고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은 마음과 내가 글 쓴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남편도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서로의 우울함에 배가 되어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말 주변이 없는 그가 불편할까 봐 애써 담담한 척했다. 


나: 이미 결과가 나온 건데 뭘 더 어쩌겠어. 받아들이는 수밖에.
용주부: 그렇지. 결과가 나온 걸 어떻게 할 수는 없지.


당일엔 둘 다 정신적 피로가 상당해서 오늘 일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대충 넘어갔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나 심사 떨어졌지? 어떡해?"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다. 하루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내 입꼬리는 턱 끝을 향해 한없이 처졌고, 쓰려고 했던 차기작도 중단했다. 

이것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쓰기가 겁났다. 


심사 불합격 통보를 받은 첫날은 병원일 까지 겹쳐 유야무야 지나갔는데 정신을 차릴수록 이 잔혹한 현실에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남의 글을 봐도 내 글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고,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건지 점점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다. 독자로서 글을 볼 때와 완전히 다른 입장이 되고 나니 뭘 읽는 것도 부담스러워졌다. 


혼돈의 하루를 보내고, 용주부에게 지나가듯 한 마디 했다. 


나: 모르겠어. 이제는 아무리 봐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내가 그들보다 부족한 게 뭘까?
용주부: 내공이 부족해서 그래. 
나: 야!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럼 신인이 내공까지 꽉 차면 무슨 경력직 인턴도 아니고, 말이 되냐고!


그렇다. 

나의 남편이자 용주부는 MBTI로 치면 전형적인 T성향의 인간이다. 그것도 제법 꽉 찬 T일 것이다. 굳이 테스트를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용주부는 나를 폄하하거나 판단하려고 한 의도가 단 0.1%도 없었지만(아마도), 안 그래도 감정 기복이 심한 내가 가뜩이나 극단의 감정 널뛰기 중인데 이런 식으로 말하니까 폭발해 버렸다. 


내가 심사에 떨어진 것 자체를 불신하는 게 아니다. 결단코, 나는 잘했는데 심사가 불공정하다느니 결과에 불복한다느니 남탓하는 게 아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지 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한 말이니 어느 정도의 공감이나 위로는 해 줄 줄 알았다. 

거의 올해 대부분의 시간을 이 작품을 쓰는데 할애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내공 운운 하며 진단 아닌 진단을 하다니 서운할 수밖에. 


용주부는 나의 사자후 같은 포효에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가만히 있자 갑자기 내적 성찰이 밀려오면서 내가 너무 첫 술에 배부르려 했구나를 깨달았다. 


나: 아무래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나 봐. 몇 연차 작가들도 심사에 많이 떨어진대. 물론 신인이라도 한 번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닌 거지.
용주부: 작품을 쓸 때 정말 다시 돌아가도 더 못할 만큼 최선을 다했어? 
나:...(한번 꾹 참고) 지금 내 상태에서는 다시 돌아가도 별 차이 없을 거야. 누구 말대로 내공이 부족한 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지금 내가 밤잠도 줄여가며 아무리 글을 써도 절대 좁혀지지 않는 물리적인 시간의 벽이라는 게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 글쓰기에도 적용된다고 단순히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대로 좌절하고 있으면 나는 성장을 멈추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제일 두려웠다. 벌써부터 내 한계가 드러난 것일까 봐. 알고 보면 내가 별 대단치도 않은 솜씨로 글 쓴다고 엉덩이로 버티고 있어 봤자 별 볼일 없는 성과만 낼까 봐. 


용주부는 나에게 "내공 부족"이라는 한 마디 심사평을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고, 아내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으면 한 번쯤 토닥여 줄수도 있는 일 아닌가!


연애할 때부터 말 주변이라고는 젬병인 데다가 좋은 말로 사람 기분을 낫게 하는 재주는커녕 되려 화를 돋울 때도 많았다. 용주부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해 봤지만, 더 큰 좌절만 맛보고 차라리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그나마 날 만나서 의식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 게 이 정도이니 말 다 했다. 

나도 이 남자와 살면서 내가 원하는 위로의 말은 들을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반쯤 포기했었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성격상 가족을 포함해 남에게 내 얘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라 어디 위로받을 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맞춤형 위로도 아니고 용주부에게 내가 원하는 말을 해 달라고 우기는 건 자판기에 대고 버튼을 누르는 거나 마찬가지 행위였다. 그런 뻔하고 시시한 억지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침대에 모로 누워 수면 안대를 끼고 이른 잠을 청했다. 꿈에서는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는 망상에 빠져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용주부가 잠을 깨웠다. 


용주부: 00아, 일어나 봐.
나:  아, 왜? 
용주부: 장 봐야 하니까 돈 좀 줘. 
나: 갑자기 장은 왜?
용주부: 일주일 치 밑반찬 만들어 둘 테니까 글 쓰다가 언제든 챙겨 먹어. 끼니 거르지 말고. 

멋쩍어진 나는 입이 댓 발 나온 자세로 일어나 못 이기는 척 식재료 주문을 했다. 

내가 토라져 누워있는 동안 용주부는 그의 요리 선생인 백 선생과 너튜브를 뒤져 반찬 만드는 법과 재료 정리를 엑셀(!)로 정리한 뒤 필요한 재료를 주문하려고 한 것이었다. 


용주부는 금 같은 휴일의 대부분을 밑반찬 만드는데 할애했다. 너튜브를 틀어놓고 동시에 요리 교실을 여는 것 마냥 중간중간에 멈춰가면서 요리를 했다. 


나는 그가 뭘 하든 말든 관심 없는 척 웹서핑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주방에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져 나왔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그가 만들어 놓은 밑반찬을 한번 쓱 둘러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몰래 집어 먹다가 걸려 된통 혼났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맛있는 반찬에 금세 기분이 풀린 나는 얼른 사진을 찍었다. 


감자볶음, 어묵볶음, 건두부면 볶음

한 번에 대 여섯 가지를 뚝딱 만드는데 집에 남은 재료를 십분 활용하면서 처음 보는 요리도 있었다. 저게 뭐지? 싶은 건두부면 볶음은 의외로 내 입맛에 맞아서 한 번 더! 앙코르를 요청했다. 


용주부는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볼 때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타입인데 급기야 반찬 가게를 열 기세로 달려들어서 두 번 나눠하라고 말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처음 보는 8첩 반상이 생겼다. 


건두부면볶음, 꼬들단무지무침, 잔멸치볶음, 파프리카무침, 감자채볶음, 어묶볶음, 메추리알장조림, 소세지야채볶음


용주부는 날 위로하는 말을 찾지 못한 대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재빨리 행동으로 옮겼다. 그의 말에 의하면 생존 위협이 그렇게 만든다나. 


아무튼 나는 용주부의 배려로 일주일 동안 혼자 점심을 먹을 때도 집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 글 쓰다가 때를 놓치면 허기져서 대충 라면으로 때우거나 할 때가 많았다. 사실 내가 열정을 가지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라서 점심 한 끼에 많은 시간이나 에너지를 쏟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요 며칠은 배가 고프면 별생각 없이 자동으로 냉장고에 꽉 차 있는 밑반찬을 꺼내서 먹고 싶은 만큼 덜어서 밥이랑 먹었다. 

여전히 심사 불합격의 충격은 쓰라리지만 대신 헛헛한 마음은 용주부의 밑반찬으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어서 견딜만했다. 


그렇게 며칠 후, 나의 지랄 맞은 기분은 또 바닥을 찍어서 연이어 있는 공모전에 나가려고 계획한 것들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한 작품을 완결하고 나면 바로 다음 작품을 이어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장편을 쓰느라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 아무리 시놉시스만 있으면 뭐 하나. 원래도 저질 체력인데 글 쓰느라 더 고갈되어 쓰레기 체력 가지고 뭘 또 바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건 자신을 정말 모르고 한 헛소리였다. 


결국, 억지로 기한에 맞추지 않고, 내 속도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나의 근황을 용주부에게 얘기했더니 역시나 대답은 음...


나: 작품 완결하고 바로 공모전이든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계속 쓰던 속도대로 못하겠어. 무리야 무리.
용주부: 아무도 너한테 글 쓰라고 한 적 없어. 쉬엄쉬엄 해. 

딴에는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의 촌철살인이 또 한 번 날 두 번 죽였다. 


아무도 너한테 글 쓰라고 한 적 없어. 쓰라고 한 적 없어. 없어. 없어...


그래, 없지.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없어. 없고 말고. 암 그렇지.  

누가 시켜서 했나? 억지로 시킨다고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내가 한다고 해놓고 왜 징징대는 건데?


나는 또 그렇게 충격의 자아 성찰을 하며 침대에 모로 누웠다. 그러자 용주부는 "다음 주 밑반찬을 뭘로 하나?"라며 슬며시 자리를 뜬다. 


반찬이 떨어지면 또 새로운 밑반찬으로 나를 채워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이라도 쓰는 것뿐. 오직 그뿐이라서 오늘도 용주부의 밑반찬으로 든든히 밥을 먹고 글을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