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지심(是非之心)
문제는 똑똑한 사람일수록 의심으로 가득 차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에 차 있다는 것이다. - 찰스 부코스키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경북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침수되어 7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지하주차장이 침수되고 있으니 긴급히 차를 빼라’는 방송을 듣고 주민들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지하주차장의 CCTV 영상을 보면, 8분 만에 지하주차장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기습적 폭우로 비롯된 잇단 비극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파트마다 차수판(물막이)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왜 이런 사고들이 왜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까? 항상 인재(人災)라는 말이 나온다. 왜 사람이 일으키는 재난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걸까?
인터넷 댓글들에는 애도하는 글도 많았지만, 관리사무소와 주민들이 좀 더 신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글들도 많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야지 왜 무모하게 안내 방송을 그대로 따라했느냐?’ ‘왜 물이 갑자기 차오를 수 있는데, 차를 빼라는 방송을 했느냐?’ 등등.
아마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다들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알아차릴 텐데,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비상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월호 추모제에 갔다가 희생자 사진전에서 옛 동료교사를 보았다. ‘아, 저 선생님이...... .’ 함께 테니스를 치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교직에 있을 때 수학여행, 체육대회, 수련회 등 행사가 있으면 짜증부터 났다. 준비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수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쉬어야 하는데, 서류 준비에 꼬박 매달려야 했다. 현장답사도 사전에 해야 하고, 다들 그런 행사를 맡지 않으려 했다.
문제는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것보다, 교사가 행사의 주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큰 그림은 다 그려져 있고, 담당 교사는 세부적인 실무에만 권한이 주어졌다. 교사와 학생이 행사의 주요한 주체인데, 학생은 따라오기만 하고 교사는 기능적인 역할만 했다.
만일 세월호 사건 때, 그 모든 것을 교사와 학생이 함께 준비했다면, 사전에 세월호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교사와 학생이 수학여행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었다면, 평소에 생각했을 것이다. 수행여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배를 타고 한참을 간다는데, 여객선들의 상태는 어떨까? 안전을 위해 꼼꼼하게 여객선에 대해 살펴보았을 것이다.
여객선들에 대해 형사들처럼 탐문조사를 했을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여객선들의 상태를 확인했을 것이다.
주체가 되지 못한 교사와 학생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행사 준비자체가 지겨운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포항의 아파트 주민들도 평소에 아파트 관리의 실질적인 주인이었을까? 우리는 일반적인 동 대표들과 관리사무소의 유착관계를 잘 알고 있다.
수동적이 된 주민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이게 된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위기 대처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우리사회는 전반적으로 매뉴얼대로 작동되는 사회다. 이런 시스템은 위기상황에서 우왕좌왕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시비지심이 있다.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옳음과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있다.
시비지심을 기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가?’ ‘배가 침몰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하주차장에 갑자기 물이 들어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본성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매뉴얼대로 살다보면, 기계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물처럼 부드러운 생각을 하는 게 힘들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위기가 닥치면, 어처구니없는 사건사고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 반칠환, <목격- 속도에 대한 명상> 부분
시간이 돈이 되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점점 빠르게 달려간다.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청개구리’처럼 죽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