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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Feb 21. 2024

‘생각하는 인간’을 위하여   

 ‘생각하는 인간’을 위하여      


 조르바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봤으니 지식을 채워 넣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상만사 모든 일을 겪어서 마음이 확 트였고 두둑한 배짱도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것처럼 풀어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어릴 적 부모님에게서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제야 부모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 것 같다.     


 생각이 많으면 삼라만상을 볼 때, 서양 고대의 철인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생각하게 된다.      


 사과를 보면 나도 모르게 사과의 이데아, 완벽한 사과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을 온전치 않은 존재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을 그 자체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자를 보면 남자의 이데아에, 여자를 보면 여자의 이데아에, 사물을 보면 사물의 이데아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냉소주의자가 된다. 자신과 다른 사람, 세상만사를 대할 때, 냉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가져라!’라는 말은 아주 위험할 수 있다. 꿈은 내면에서 솟아올라오는 힘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     

 밖에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가지 말아야 한다. 산에서 보는 나무와 풀들은 항상 꿈을 꾼다.     


 뿌리는 물을 향해 발을 뻗어간다. 목표는 없다. 단지 온 힘을 다해 물을 향해 뻗어갈 뿐이다.           


 가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어간다. 목표는 없다. 단지 온 힘을 다해 빛을 향해 뻗어 갈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멈출 줄 안다. 다른 나무의 뿌리와 가지들과 온 힘을 다해 경쟁하지만 멈출 줄 안다.     


 그래서 숲은 늘 아름답다. 각자의 힘만큼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자신의 힘 이상의 세계를 넘보지 않는다.     


 삼라만상,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다 쓰며 살아간다. 힘이 다하면 자신을 다 내어 놓는다.     


 삼라만상은 하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천지자연은 하나이면서 각자의 몸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유한한 삶과 무한한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도 오랫동안 신화에 의해 이러한 삶을 살았다.     

 각자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무한한 신(神)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 인류는 철기시대에 ‘자아(自我) 중심의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이 자아는 ‘나라는 의식’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 자아가 비대해진다. 무한히 팽창한다.     


 그래서 지식은 위험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너의 광기로 하여금 항상 이성을 감시하게 하라!”라고 말했다.     


 광기는 우리 안의 알 수 없는 충동이다. 우리는 이 충동의 힘을 믿어야 한다. 조르바는 몸으로 살아왔기에 충동의 힘을 잘 안다.      


 ‘그는 세상만사 모든 일을 겪어서 마음이 확 트였고 두둑한 배짱도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는 것처럼 풀어낸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생각으로 살아가면, 사람과 사물을 이데아의 유사품으로 보게 된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혐오는 생각 과잉이 빚어낸 병든 사회의 증상일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고 

 생명이 있고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 월트 휘트먼, <내가 시가 된다는 것> 부분           



 대답은 ‘내가 시가 된다는 것’이다.     


 시(詩)는 이 세상의 언어이면서 순수한 나의 언어다. ‘큰 나’로 살아가게 한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다.        

 이 세상의 언어는 우리를 세뇌한다. 언어의 꼭두각시가 되게 한다. 우리는 몽유병자처럼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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