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는 자연을 따른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노자는 말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왜 그는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자”라고 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강자는 남을 이기는 사람인데.
인류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자신을 이겨라!” 왜 자신을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가 될까?
동물들을 보자. 그들은 자신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을 이기려 한다. 사자는 모든 동물을 다 이겼기에 백수(百獸)의 왕이다.
노자식으로 동물들을 보면, 모두 강자다. 그들은 항상 절도있게 살아간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옆으로 토끼가 지나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자를 피해 도망치는 얼룩말, 그는 힘이 다하면 순순히 사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의 눈빛은 슬프지 않다.
가을에 쓰러져 눕는 누런 풀잎들, 그들은 신음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사(生死) 앞에서 초연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배가 불러도 더 먹으려 한다. 다음에 먹기 위해 안전한 곳에 보관한다.
인간만큼 잔혹한 동물은 없다. 동족을 수백만 명씩 살해하는 동물이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은 무서운 악마가 된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는 그들을 외려 칭송한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영웅이 된다.”
이러한 인간 세상의 잔혹성에 치를 떨며 노자는 말한 것이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자다.”
노자가 살던 당시 중국 사회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였다. 철기가 등장했다.
철기를 갖게 된 인간은 누구나 최강자의 꿈을 꾸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어떤 물질을 보면 어떤 생각이 생겨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다.
철기가 없던 시절에는 인간은 그렇게 잔혹하지 않았다. 석기와 청동기는 강한 무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기시대 이전의 전쟁은 잔혹하지 않았다. 이후 인간은 온갖 새로운 무기를 생산해내며 끝없이 잔혹해져 갔다.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했기에 내면에 야수의 본능이 있다. 동물들은 이 야수성을 본능으로 제어하기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끝없이 욕심을 부릴 수 있기에, 욕심과 야수성이 만나면 인간은 무서운 악마가 된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끝내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의 안의 야수성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조르바는 어느 날 아침에 나무 등걸에 붙어있는 나비의 번데기를 본다. 잠시 후 나비가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른다.
조르바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준다. 조르바는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동정심)’를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조르바는 크게 깨닫는다.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노자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도(道)는 자연을 따른다. (道法自然)” 우리는 항상 우리 안의 ‘자연(自然)’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선(善)과 악(惡) 사이에서 요동치는 마음’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선와 악은 하나다. 언제나 하나로 붙어있다. 우리는 우선 요동치는 마음부터 안정시켜야 한다.
고요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요한 마음은 천지자연과 하나의 마음이라, 진정한 사랑이 된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 김광섭, <마음> 부분
인간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이다.
우리는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 한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한 인간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