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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Feb 14. 2024

동정을 넘어서   

 동정을 넘어서      


 용모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여자의 뒷면에는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마냥 귀엽던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돌변한다. 부모와 대화를 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아이는 다시 제2의 자궁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자식이 아니라 세상의 자식으로 거듭나려 용맹정진하는 것이다.      


 이 고된 수행을 원시시대에는 사회가 도와주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제사장이 나타나 엄마에게서 아이를 빼앗아갔다.     


 엄마는 울부짖는 척하고,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제사장의 권위에 짓눌려 아이는 어쩔 수가 없다.     


 홀로 높은 산중의 오두막에 버려진다. 야수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내고, 다음 날부터는 맨살에 못을 박기도 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아이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는 죽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런 성인식을 통과한 아이는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된다. 한평생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전래 동화들도 주제가 같다. 다들 집을 떠나게 된다. 집을 떠나 영웅이 되어 귀환한다.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어야 한다. 소인배로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 영웅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단독자다.     


 삼라만상 모두 단독자로 살아간다. 노자가 말하듯 천지는 인(仁)하지 않다. 천지자연은 한치의 동정심도 없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초인(위버맨쉬)의 여정을 다룬다.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시험은 동정이다. 그는 새벽에 뛰어난 제자들을 두고 동굴을 떠난다.      


 삼라만상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 오직 홀로 불타오르는 것뿐이다.     


 그는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 두고 동굴을 떠난다. 그는 태양이 되었다. 삼라만상은 모두 태양의 후손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여전히 빛이 존재 그 자체다. 성인들의 배경에는 항상 은은한 빛이 있다.      


 우리도 얼굴이 눈부시게 빛날 때가 있다. 우리 안에서 태양이 깨어날 때다. 그때는 존재 그 자체다.     


 스스로 불타지 않는 존재는 다른 존재를 동정하려 한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동정심이 밖으로 투사되는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늙은 과부를 보고는 동정을 한다. 하지만 조르바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용모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 모든 여자의 뒷면에는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런 눈을 가진 조르바는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빛이 다른 사람을 따스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춘기를 제대로 겪지 못했다. 영웅이 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 한다.     


 그 의존성을 동정, 사랑으로 미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든 폭력은 동정,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 강은교, <사랑법> 부분              



 시인은 얼마나 힘들게 ‘사랑법’을 터득했을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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