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때가 있다
제대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을성 있게 햇빛 아래에서 날개가 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불어 넣은 숨이 나비로 하여금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쪼그라진 채 미숙아로 나오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 나비는 때가 차기 전에 나와서는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내 손 안에서 죽어갔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구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불경의 경전 금강경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
‘상에 머무름이 없이 베풀라.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상(相)은 ‘겉모양’을 말한다.
남을 도와줄 때, 속마음은 다르더라도 겉모습은 같을 수 있다. 따라서 남에게 베풀 때 속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을 도와줄 때, 진정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도와준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마음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도와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베풂일 것이다.
왜 이것이 진정한 베풂일까? 알고 베푸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진다. 의식은 자신이 아는 마음이고, 무의식은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다.
인간은 자신을 자각하는 자의식(自意識)이 있어, 자신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은 자신부터 먼저 챙기게 된다. 남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그럴듯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선행(善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생각들을 성찰하지 않고 선행을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악행(惡行)을 저지르게 된다.
조르바도 치명적인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제대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을성 있게 햇빛 아래에서 날개가 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 그 나비는 때가 차기 전에 나와서는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내 손 안에서 죽어갔다.’
그는 길을 가다 번데기에서 막 부화하는 나비를 본다. 힘겹게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오려는 나비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조심스레 입김을 불어 넣어준다. 나비는 쉽게 껍질을 벗고 나오게 된다. 하지만 그 나비는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내 손 안에서 죽어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수많은 폭력이 사랑의 결과로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 악행을 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천지자연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치대로 돌아간다. 이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만이 사랑이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이치를 알 수 있을까? 이 이치를 아는 마음이 우리의 무의식에 있다.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영혼이다. 이 영혼은 천지자연과 하나로 이어진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면, 진정한 사랑이 된다.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서 “지금 도와줘야 해!”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 그때가 바로 남을 도와줄 때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부분
내 인생이 가을이 되었다.
항상 때를 생각하게 된다.
조만간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