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육체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중국 드라마 ‘사마의’를 보며 생각한다. 단 한 사람도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다들 항상 근심이 가득하다.
사마의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뛰어난 전략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기에 마음이 편한 날이 없다.
밖에는 불후의 전략가 제갈공명이 있고, 안에는 그를 항상 경계하고 감시하는 위왕 조조와 조비, 조예가 있다.
그렇게 살아가다 그의 머리가 드디어 하얗게 세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때, 한평생이 얼마나 허망할까?
사마의만 그럴까? 모든 사람의 한평생이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은 한 짐이다.
산에서 보는 짐승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항상 홀로 깨어 있다. 삶을 온전히 누리는 것 같다.
나뭇가지 위를 춤추듯 오가는 다람쥐, 그의 눈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도 평화로워 보인다.
물론 그들도 배가 고프고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머리가 몸의 왕이다. 문제는 이 왕이 횡포를 부린다는 것이다.
몸은 이미 위험을 알고 있는데, 머리가 호기를 부리며 수시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후회를 한다. 하지만 그 후회는 계속 반복된다. 머리가 왕 노릇을 그만두어야 그 후회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조르바는 머리에서 해방된 몸으로 살아간다. 조르바를 보며 카잔차키스의 화신인 ‘나’는 생각한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는 인간을 마음과 몸으로 나눠서 본다. 학창 시절에 서양 사상의 이분법을 꾸준히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하나다. 동양 사상은 일원론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잘 알 수 있다.
몸이 피폐해진 사람의 영혼이 맑을 수 없다. 또한 영혼이 타락한 사람의 몸이 건강할 수 없다.
우리는 머리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몸의 소리를 듣고,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머리가 중심인 사람은 사마의의 삶과 같다. 절대 권력의 황제가 있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음이 항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황제는 자유로울까? 그도 신하와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 항상 전전긍긍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웠던 시대는 원시사회였다. 그때는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의 최고 지도자 부족장은 철저한 봉사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최고 지도자 사령관이 있었지만, 그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민(民)이 주(主)가 되는 민주주의 사회는 인류의 문명사(文明史)에서는 하나의 기적이다.
절대 권력에서 해방된 인간이 무한히 아름답듯이 머리에서 해방된 인간의 몸도 무한히 아름답다.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 이기철, <돌에 대하여> 부분
돌의 일생, 천지자연, 삼라만상의 일생이 이렇지 아니한가?
인간만이 예외다.
우리는 한평생 시인처럼 ‘돌에 대하여’ 명상을 해야 한다. 항상 돌을 닮으려 용맹정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