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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석근 Mar 27. 2024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 무언가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이 거대한 밀물의 한가운데서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머리말 에서          



 어제 공부 모임에서 한 회원이 질문했다.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알려고 해야 하나요? 제 나름대로 생각하며 읽어야 하나요?”     


 예전 같으면, “저자의 생각이 중요해요.”라고 대답해야 했을 것이다. 정답이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현대 사회에서는 정답이 아니라 해답을 구해야 한다. ‘절대적인 가지의 기준’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에는 ‘나’라는 정체성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남자, 여자, 귀족, 평민.......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사라졌다.     


 현대 사회에서는 나를 만들어간다. 남자라는 정체성이 싫은 남자는 자신을 여자로 재탄생하게 한다.          


 이제 타고난 신분도 사라졌다. 고객이 왕이 되고, 대통령,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이 머슴이 된다.       


 과거에는 비범한 사람들만 자신을 발명해갔다. 이제는 누구나 자신을 발명해가야 한다. 


 책을 읽는 것도 자신을 발명해가는 정신 활동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으니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생각은 곧 언어다.     


 풍부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은 풍부해진다. 다양한 책을 접하며,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에 빠져들지는 말아야 한다. 저자의 생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으로 저자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흡사 책을 읽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좋다는 산삼도 몸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가 된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     


 살아오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한 책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책은 삶을 비약적으로 성숙하게 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 책을 읽는 것도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갇히기 쉽다.     


 인간을 컴퓨터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아주 많이 잘못된 생각이다. 컴퓨터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부품이 고장 나면 새로 갈아 끼우면 된다. 인간도 그럴까? 인체의 한 부분이 고장 나면, 인공의 인체를 갈아 끼우면 될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틀니를 끼우고, 임플란트하는 것 등. 하지만 인체는 천지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의 부품을 갈아 끼우면, 전체의 몸, 천지자연에 변화를 주게 될 것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예측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을 알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성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니, 항상 이성을 발휘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숙고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니체는 항상 자신을 발명해가는 인간을 초인(위버멘쉬)이라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지금은 초인이 극소수이나, 차츰 초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급격하게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다.          



 깊은 독서 끝에 

 처박혀지는.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왜냐하면 그게 그거인 나날, 

 그러나 비유는 다채롭기에.      


 - 황인숙, <비유에 바침> 부분           



 우리의 삶은 ‘쓸쓸하고 그게 그거인 나날’이다.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한 인간의 슬픔이다.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보자.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의미 없이 해가 뜨고지고, 형벌처럼 삶은 반복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상상력의 빈곤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동물이다. 더 생각을 밀고 가 보자.     


 생각이 비유에 다다를 때까지. 하나의 사물이 새로운 사물로 탄생하는 마법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이 온통 화엄(華嚴)이 될 때까지, 자신을 비유에 바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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