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도서관에서 책장에 붙은 번호를 보고 직진했다.
400번과 500번.
순수과학과 기술과학 코너다.
특히 좋아했던 건 지구 과학이나 생명 과학류였는데,
(tmi로 천체를 가장 안 좋아했다.)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과 같은 도감류를 읽는 걸 정말 좋아했다.
동물들의 학명을 외우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학명을 읽어보고, 생김새를 살펴보고, 서식지나 특징을 알아보고 하는 것이 그저 재미있었다.
그러는 중에 나의 손을 타지 않는 생명체가 있었는데.
바로 곤충들이었다.
이른바 벌레들 말이다.
어린이용 자연 과학책들은 대체로 한 책당 하나의 생명체를 정해 사진과 그림, 설명을 다양하게 실어 놓는다.
'미끌미끌 개구리' 같은 제목이면 개구리 표지로 시작해서, 개구리가 알일 때의 사진, 올챙이 일 적 사진 등의 일대기를 사진과 그림으로 소상히 확인할 수 있다.
개구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책은 손도 못 대는 끔찍한 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진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생리적 거부감은 생각보다 상당하다. 다들 어렸을 때 싫어하는 사진 표지인 책을 책장에서 퇴출시킨 경험이 있으리라 믿는다.
10살 11살 정도 됐을 때의 나이었던 거 같다.
나는 그날따라 용기가 불쑥 솟아올랐고, 평소에는 소름 끼쳐 손도 못 대던 '벌' 사진이 있는 과학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사진 위에 턱 하니 올렸다.
그토록 소름 끼쳐하던 벌레 사진을 만진 거다.
전율이 일었고, 성취의 소름이 끼쳤다.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마냥, 경이로운 모험이라도 한 마냥 언니에게 뛰어가 자랑했다.
언니의 시큰둥한 반응까지가 내 머릿속 기억이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왜냐면 그때 나는 벌 사진을 만진 용기 있는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당연한 일이지만, 별로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당연히 실제 벌처럼 움직이거나 까슬거리지도 않았다.
코팅된 책 표지의 미끌거리는 감촉이 느껴질 뿐이다.
그러니까,
고작 사진일 뿐이다.
사진은 절대로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고작 해봐야 사진이 프린트된 종이에 손을 베이는 정도인데, 그마저도 사진 자체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두렵고 거부감이 들던지.
요즘 마음 챙김류의 글이나 이야기를 많이 읽는 편인데, '모든 상처는 과거형'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그리고 모든 상처는 과거형이기에 '사진'과 같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그 글귀를 읽고 나서 문득 내 어릴 적 경험이 떠올랐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사진 그 자체로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손을 대도, 노려보듯 쳐다봐도 나에게 그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진에 손을 대는 일이 10살 최고의 용기 중 하나였다.
꽤나 많은 해가 지나간 올해의 나에게 슬쩍, 그래서 이제 사진을 잘 만질 수 있어?라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뭐, 과거에 겁냈던 벌레 사진을 만지는 일쯤은 우스워졌지만.
정말로 두려워하고 방치하며 외면한 것들은 오히려 푸른 수염의 방이나 도시전설 마냥, 이유는 없고 그저 안된다는 허상만 남아 내 안에 남은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벌 사진을 만지던 용기가 가득한 내 어릴 적 모습이 우상처럼 느껴진다. 그 아이이가 내가 되었음에도 그 아이의 용기에 부러움을 느낀다.
나에겐 사진처럼 남아있는 괴로운 것들이, 두려운 것들이 여전히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과거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직도 버겁다. 마치 사진뿐인 벌 사진에 손을 대기 무서워했던 나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오늘은 진 거 같기도 하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며 거기의 아픔을 굳이 찾아내어 다시 내 상처를 헤벼내곤 했다. 그러고서는 만지기가 버거워 집게손가락으로 어디든 팽개쳐 놓는 걸 반복한다.
고작, 사진에 손을 댈 용기가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 걸까.
그렇게 자문하게 된다.
내일은 나에게 용기가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보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