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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아티스트 May 08. 2022

나의 피아노 방랑기 1

피아노 욕심은 끝이 없다  

우리 집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건 7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처음 피아노학원 다닐 때는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건반을 그려놓은 종이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연습하곤 했다. 소리 나지 않는 종이 건반을 열심히 짚어가며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갔다. 그렇게 바이엘을 뗀 것 같다. 피아노가 처음 생겼을 때 기억은 확실하지 않은데, 피아노가 없을 때의 기억이 꽤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이후로 우리 집 거실엔 항상 피아노가 있었다. 

 중학교 때 더이상 피아노를 배우지 않게 됐지만, 피아노는 계속 우리 집 거실 한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 예전에 쳤던 곡을 쳐볼 때가 있기는 했는데, 점점 피아노 뚜껑을 열 일이 줄어들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피아노는 점점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어갔고, 내가 취직하고, 이사를 몇 번 다니던 와중에, 언제인지도 정확히 기억도 안 나지만, 피아노가 집에서 없어졌다. 

다시 피아노를 산 것은 내가 결혼해 가정을 꾸린 후였다. 큰 딸이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쯤이었던가. 처음부터 피아노를 사려고 나간 건 아니었지만, 동네 쇼핑센터에 들렀다가 중고 영창 피아노를 파는 걸 보고 다소 즉흥적으로 사버렸다. 딸에게도 피아노는 기본으로 가르쳐 줘야지 생각했다. 딸은 피아노를 배우기는 했지만 피아노보다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딸이 별로 열심히 치지 않아 피아노는 곧 구석방 자리를 차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대신 나는 디지털 피아노도 한 대 샀다. 딸이 디지털 피아노의 다양한 기능에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기능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산 가와이 디지털 피아노에 뚜껑이 없다는 건 피아노가 집에 배달되고 나서야 알았다. 퇴근해서 집에 와 있는 피아노를 보고, 뚜껑을 빠뜨리고 안 가져오셨으니 빨리 갖다달라고 매장에 전화까지 했다. 알고 보니 내가 고른 그 모델은 원래 뚜껑이 없는 모델이었단다. 헉. 

뚜껑이 없는 걸 모를 정도로 나와 딸이 정신이 팔렸던 기능은 (다른 디지털 피아노에도 다 있는 기능인지도 모르겠지만)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마다(아무  건반이나 눌러도) 미리 내장된 유명 피아노곡 녹음이 한음 한음 순차적으로 재생되는 기능이었다. 그러니까 박자만 맞춰 아무 건반이나 눌러주면 그 곡을 실제로 치는 것처럼 '쇼'를 할 수 있었다. 아이의 피아노 실력은 늘지 않았지만, 이 기능을 활용해 마치 자기가 치는 것처럼 연출하는 연기력만 늘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쇼를 하다 보니 유명한 곡들을 아이가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재미 삼아 이 피아노로 쇼를 해보거나, 아이가 동요 부를 때 반주를 해주는 데 주로 썼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영국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최소화하느라 피아노는 처분했고, 디지털피아노는 친정집에 맡겼다. 영국에서 나는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 학교 뮤직센터 연습실을 이용해야 했는데,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학교 연습실 피아노는 대부분 야마하 업라이트였다. 하도 여러 사람이 많이 쳐서 조율 상태는 안 좋았지만, 삼익과 영창 피아노만 쳤던 나로서는 야마하 피아노로 연습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뿌듯했다. 야마하 피아노는 나에게 '꿈의 피아노' 같은 거였다. 이모는 외가가 잘 살던 시절, 집에 있었던 야마하 피아노 얘기를 종종 했었다. 그래서 상태 좋은 야마하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 자리가 나면,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다른 방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들어도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누가 저렇게 잘 치나 싶어 내다보니 우리 가족이 사는 기숙사의 건너편 집에 사는 일본인 가츠미였다. 미국에 살다가, 영국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남편을 따라 왔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줄은 몰랐다. 가츠미는 피아노를 전공한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쭉 피아노를 쳐왔고, 파트 타임으로 취미 피아노 레슨도 했다고 한다. 전공하지 않아도 꾸준히 치면 저렇게 되는구나. 조금 부러워졌다. 나는 피아노 얘기를 하면서 가츠미와 친해졌고, 같이 음악회를 보러도 다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가츠미가 기숙사 바깥으로 이사를 나간다 했다. 알고 보니 피아노 때문이었다. 원래 쓰던 그랜드 피아노를 미국에서 가져오는데, 기숙사가 작아서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피아노가 어떤 집에 살지를 결정하게 만든 것이다. 가츠미가 이사간 집은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가츠미는 여기서 피아노 레슨을 다시 시작했다. 내 딸도 가츠미의 학생이 되어 나는 매주 두번씩 레슨 받는 딸을 데리고 이 집을 드나들었다.  

나는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과 주방 사이에 놓인 이 작은 집이 딱 마음에 들었다. 피아노가 말 그대로 집의 '중심'에 놓인 집이었다. 나는 딸이 레슨을 받는 동안 따뜻한 햇살 드는 거실 창가에 앉아 기다렸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기도 하고, 가츠미의 아기를 봐주기도 했다. 끝나면 가츠미와 차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이 시간이 좋아서 딸이 레슨 가는 날을 기다렸다. 

가츠미는 자신의 피아노가 그랜드 피아노 중에서는 가장 작은 사이즈로 '베이비 그랜드'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에도 '베이비'가 있다니. 전에는 모르던 사실이었다. '베이비'와 '그랜드'라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의 조합인데, 듣자마자 좋아졌다. 뭔가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베이비 그랜드'라는 명칭을 알고 나니 피아노 소리가 더 따뜻하고 친근하게 들렸다. 가츠미의 아기가 옹알거릴 때,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 소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아. 행복하다. 내가 이런 시간을 누려본 적이 있었던가. 내 인생에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또 찾아올까.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리 집에도 이런 피아노가 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영국 연수 시절을 추억할 때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가츠미의 집 풍경을 떠올린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정집에 맡겨놨던 디지털 피아노를 가져왔다. 그랜드 피아노에 대한 로망이 생긴 상태였지만, 엄두는 내지 못했다. 우리 집엔 그랜드 피아노 놓을 자리도 없었고, 그랜드 피아노 살 돈도 없었다. 영국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계속 피아노를 열심히 칠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디지널 피아노는 성에 차지 않았다. 피아노가 안 좋다는 게 피아노 안 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아이는 더이상 '쇼'를 하지 않았고, 나는 디지털 피아노의 멍멍한 터치와 녹음된 소리가 점점 더 싫어졌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그 뚜껑 없는 디지털 피아노를 처분했다. 그리고 정말 큰 마음 먹고 다시 피아노를 샀다. 나에게는 '꿈의 피아노'인 야마하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업라이트 중에서는 가장 좋다는 모델이었다. 피아노 놓을 자리를 마련하느라 며칠 동안 열심히 짐으로 가득했던 작은 방을 정리했다. 드디어 피아노가 집에 배달되던 날, 나는 좀 흥분했었나 보다. '야마하 피아노'라니, 꿈의 피아노를 드디어 장만한 거였으니까. 둘째가 그림 일기장에 이렇게 써 놓았다. 

"오늘 피아노가 왔다. 엄마가 좋아서 '개구리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딸은 팔 벌려 뛰어오르는 내 모습과 커다란 피아노를 일기에 그려넣었다. 내가 진짜 '개구리처럼' 팔딱팔딱 뛰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많이 좋아했던 건 사실이다. 좋은 피아노를 들여놓으니 확실히 피아노를 전보다는 더 많이 치게 되었다. 회사 근처 학원에서 다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예전에 안 쳤던 몇 곡을 새로 배웠다. 바쁠 때는 좀 쉬다가, 좀 시간이 나면 다시 치는 식으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남편의 해외 지사 발령으로 나도 휴직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에 가게 되었다. 중국은 한국과 가까우니 아이들 방학 때는 한국에 와서 있을 곳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한국의 집은 그대로 남겨두고 중국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갔다. 새로 산 피아노도 한국에 남았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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