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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아티스트 Dec 14. 2021

누더기 원서, 낙방의 '알리바이'  

예술중학교 입시, 떨어져서 다행이다

나는 중학교 입시에 낙방했다.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예술중학교에 지원했지만, 보기좋게 떨어진 것이다. 예중 입시에 떨어지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고, 피아노 배우는 것도 그만뒀다. 그런데 얼마 전 동생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수십년 전에 치렀던 그 입시에서 내가 떨어진 건 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 때문에 떨어졌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기억 안 나? 내가 언니 원서를 찢어버렸잖아. 
뭐? 진짜? 

나보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은 당시 '입시 준비로 힘들다고 온갖 유세를 떨던' 내가 꼴 보기 싫었고, 지금은 잘 기억 나지 않는 어떤 사건으로 나와 심하게 다퉜다고 한다. 동생은 내 지원서를 갖고 와서 찢어버리겠다고 위협했고, 나는 '찢을 수 있으면 찢어봐!' 하고 약을 올렸다. 독이 잔뜩 오른 동생은 진짜로 내 눈 앞에서 원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다. 인터넷 접수 같은 건 당연히 안되고, 손으로 쓴 원서를 현장에 가서 내야 하는 시절이었다. 엄마도 크게 화를 냈지만 동생을 제대로 혼낼 겨를도 없었다. 별수없이 찢어진 원서를 복구해야 했다. 스카치 테이프로 조심조심, 갈기갈기 찢어진 원서를 찢어붙였다. 그렇게 나는 누더기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쳤다고 한다.  

언니 진짜 생각 안 나? 떨어지면 너 때문이라고, 책임지라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이상하네. 전혀 기억에 없는데. 
그래? 사실 나 오랫동안 그것 때문에 언니한테 미안했는데. 
진짜? 왜 난 생각이 안 나지? 

엄마한테 물었더니 그런 일이 과연 있었다. 엄마는 덕지덕지 테이프로 이어붙인 누더기 원서를 내면서, 민망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접수처 직원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어린 동생이 잘 모르고 찢었다고. 누더기 원서를 받아든 직원도 웃었다고 한다. 아마 황당해하는 웃음이었으리라. 심사위원이 이 누더기 원서를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술중학교 입학을 두고 집안에서 의견이 갈려 싸움이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나는 왜 그 큰 사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까.

나는 이모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모는 동네에서 유명한 레슨 선생님이었다. 동생들도 같이 피아노를 배웠지만, 모두 금방 그만두고 나만 남았다. 이모는 내가 피아노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이모처럼 음악을 전공하면 좋겠다고 했다. 연습을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피아노 잘 친다고 칭찬 받는 건 좋았다. 그렇게 몇 년을 계속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장래희망이 '피아니스트'인 아이가 되어 있었다. 


'피아니스트'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근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피아니스트라는 말을 잘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이 말을 몰랐을 때는 그냥 '음악가'라고 했었지만, 이 말을 알고 난 후엔 줄곧 애용했다. 더 멋지게 들렸으니까. 나는 학교 음악시간에 종종 불려나가 풍금(당시엔 피아노가 있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을 쳤고, 콩쿠르에 나가서 입상하기도 했다. 잡지에서 줄리아드니 커티스니 하는 해외 유명학교 얘기를 읽고, 그 곳에 있는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역시 피아니스트는 멋진 거구나! 


이모는 예중 예고 입시생 레슨을 많이 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예술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먼저 예술중학교를 가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집은 특별히 잘 살지도 못 살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집이었다. 예술중학교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들 거라고 주변에서 걱정했지만,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는 열의가 대단해서 '입던 속옷을 팔아서라도' 내 학비는 대겠다고 했다. 


실기 시험 준비한다며 몇 달씩 학교 수업을 빠지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나도 막판 한 달 정도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집에서 하루종일 피아노를 쳐야 했다. 처음 해 보는 '집중.심화 연습'이었다. 이전에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고서도 음악적 감각과 눈치로 때우고 넘어간 곡이 많았다. 어렸을 때 치는 비교적 쉬운 곡이라 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입시곡 세 곡을 모두 그렇게 '때우고'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평소에는 80퍼센트 정도만 하고도 새 곡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입시곡은 100퍼센트 완성을 목표로 해야 했다. 


그런데.......연습이 너무 지겨웠다. 시간은 채우는데 억지로 하는 거였다. 손가락은 돌아가는데 마음은 딴 데 있었다. 틈만 나면 시계를 쳐다봤다. 아 힘들어. 아 답답해. 왜 시간은 이렇게 천천히 가는 거야. 아 학교 가고 싶다. 아 놀고 싶다. 아 연습하기 싫다아아아아아아!.....야 정신차려! 시험 얼마 안 남았어. 그 때까지만 참으라고! 그래 참자! 참자! 참자아아아아아아!....... 날마다 이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아. 예술중학교 가면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걸까. 이래 갖고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차마 꺼내놓지는 못했다. 

연습 기간이 쌓이다 보니 실력이 늘기는 했다. 시험 전 마지막 레슨에서, 이모는 이대로만 하면 합격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기보다 먼저 치러진 교과목 필기시험장에서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너무 어려웠다. 문제지와 답안지가 따로 있고, 사지선다형 문제의 답안을 골라 해당 번호 칸을 까맣게 채워야 하는 양식도 생소했다. 시간에 쫓겨 답안지를 제출했다. 남들은 필기시험 때문에 과외도 한다는데, 엄마하고 이모는 평소 내 실력대로 하면 된다고 했으니, 날 과대평가한 거 아닐까. 

실기시험장에서도 잘 풀리지 않았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으니 시험장에 먼저 들어간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왜 이렇게 잘 치는 거지? 국제 콩쿠르에 나가는 피아니스트들도 다른 사람 연주는 다 나보다 잘 치는 것처럼 들려서 일부러 안 듣는다고 하는데, 당시 나는 오죽했으랴. 너무 긴장해서 내 차례가 되자 가장 쉬운 첫번째 곡에서 평소 안 하던 실수를 해버렸다. 그 다음은 어떻게 쳤는지 생각이 안 난다. 시험 끝나고 어땠냐고 묻는 어른들에게는 어물어물 그냥 평소 치던 대로 쳤다고 했다.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금 울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막상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시험에 낙방한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나를 향한 어른들의 기대에서도, 막연한 환상에서도 벗어났다. 피아니스트가 장래 희망이라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저지른 누더기 원서 사건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예술중학교 입시에 떨어진 게 실제로는 나에게 큰 타격이 아니었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떨어져서 정말 속상했다면 원서를 찢어버린 동생의 만행도 두고두고 탓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동생에게 화를 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생이 낙방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줬다고 여겨서, 쿨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동생은 내 분석을 듣더니 깔깔 웃었다.

아 언니,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갱년기라 기억력이 감퇴된 거라고! 
아니야, 갱년기라 그런 게 아니라, 계속 기억에 없었다니까.  

그래? 그럼 뭐, 이제부턴 언니 피아노 못 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누더기 원서 내서 떨어진 걸로 해.
하하하. 그러지 뭐. 

나는 지금도 그 학교 앞을 지나갈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그 때 이 학교에 떨어졌던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갔더라도 너무나 뛰어난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느꼈거나, 혹은 진짜로 어려워졌던 집안 형편 때문에 중간에 그만뒀을 것 같다. 억지로 버텼더라도 피아노를 싫어하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혹시나 내가 누더기 원서 때문에 떨어진 거라면, 진짜 동생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예술중학교 낙방은 전혀 아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아노를 일찍 그만뒀던 건 아쉽다. 피아노 치는 즐거움을 그 때는 잘 몰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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