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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Dec 18. 2021

그러나 서울은 미지의 겨울

싱싱한 제철 서울을 계절마다 한 상 차려내는 컨시어지의 겨울나기.

도시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세하지만 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도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이끄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인 계절일 것이다. 계절은 새로 지어지거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대한 건물보다도 더 대단한 변화를 도시에 가져온다. 만약 어떤 도시가 두 개 이상의 계절을 품었다면 그곳은 다채로워진 계절만큼이나 보여줄 수 있는 모습 또한 다양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지루할 틈이 없다. 한 해 동안 네 개의 계절이 부지런히 번갈아가며 서울의 옷을 갈아 입혀주는데 이러한 ‘계절 버프’를 받은 서울의 모습이 어찌 매번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늘 계절을 앞서 다음 시즌을 미리 준비하는 루틴이 익숙한 우리의 컨시어지는 이 버프를 가장 현명하게 활용하곤 했다. 어느 계절에 도시를 방문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인상과 도시에서의 경험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컨시어지는 매번 계절에 맞는 최선이자 최고인 서울을 준비했었는데 이를 ‘제철서울’이라 부르고 싶다. 제철음식이 있듯이 제철서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매번 4가지 ‘제철서울’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지만 고맙게도 컨시어지를 쉬어가게 해주는 계절도 있다. 바로 겨울이다. 정확한 시점을 콕 집어내자면 12월부터 2월 초로 연말 약속과 휴가 계획으로 달력이 꽉 채워지는 이 시즌이 아이러니하게도 컨시어지에게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컨시어지와 이메일로 씨름하던 대부분의 외국인 게스트들이 서울을 덜 찾기 때문이다. 서울 대신 겨울 레포츠에 제격인 유럽의 도시나 겨울에 떠나야 제맛인 따뜻한 휴양지인 남미 또는 동남아의 도시들로 향한다. 하지만 아시아 국적을 가진 게스트들은 여전히 서울과 컨시어지를 찾는다. 일 년 내내 무더운 여름만이 존재하는 동남아시아 또는 중동에 살고 있는 이들은 여름과 가장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겨울을 가장 가까운 아시아, 그것도 서울에서 만끽하고자 한다. 새하얀 눈을 병에 담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물어볼 만큼 겨울은 그들에게 특별한 계절이기에 서울을 선택한 그들의 겨울 여행은 이유를 불문하고 특별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별함을 채우기에 서울은  무언가 부족했다. 한국의 사계절을 순차적으로 경험한 컨시어지로서 솔직하게 터놓자면 가장 준비하기 어려웠던 계절겨울이다. 게스트에게 겨울이 찾아온 서울에서 어떤 경험을   있을지  답을 찾는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사도 서울에 다녀간다. 한강을 얼려버릴 만큼 확실하게 춥고 화끈하게 눈도 내리는 곳이 서울이다. 이렇듯 서울의 겨울이 주는 계절감은 아주 확실한데 어째서 서울의 겨울은 그들의 리스트에 아직 없으며 컨시어지였던 나조차 애를 먹었던 것일까?


기본적으로 여행이란 볼거리, 먹거리, 할거리 이 삼박자가 2인 3각 경기를 하듯 호흡이 딱딱 맞아야 한다. 아무리 여행의 목적이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여행이라 해도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에 비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결국 ‘뭐 하지? 할 거 없나? 뭐 볼 거 없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공백을 채우게 된다. 애초에 계획은 없었지만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하며, 그 빈 여백을 이왕 채울 거 유의미한 일들로 꾸리고자 한다. 그래서 늘 남을 위해 여행을 ‘짓는’ 컨시어지의 여행은 이 세 개의 뼈대가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게스트의 일정은 더욱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다시 서울의 겨울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일단 겨울이라고 하면 눈이 내려야 하는 법. 그러나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봄꽃 개화시기나 단풍시기와 달리 눈이 내리는 것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변수다. 게스트는 촉각적으로 와닿는 추위를 느끼며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황홀한 서울의 겨울에 할 수 있는 총체적인 일정을 컨시어지에게 의뢰하는데 내가 눈을 내리게 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한 노릇이다. 운 좋게 눈이 내리면 좋겠지만, 눈이 내리지 않는 많은 겨울날에도 게스트의 여행을 계속되어야 하는데 서울의 겨울은 참으로 미지수다.


겨울의 시작인 12월을 잠시 살펴보면 서울은 크리스마스를 거국적으로 기념하거나 즐기는 도시가 아니다. 해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홀리데이 무드와 최대한 비슷한 분위기라도 내고자 가는 곳곳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소품들로 꾸밀 뿐 우리가 기대하는 그 무드는 사실상 느낄 수 없다. 그나마 서울의 겨울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면 유명 백화점들의 크리스마스 불빛 장식과 포토존, 청계천과 시청에 선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롯데월드의 아이스링크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뚜렷하게 각인된 서울의 겨울이 딱히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징성을 가진 겨울 명소들이 점처럼 서울에 뿔뿔이 흩어져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덮은 크리스마스 미디어 파사드 앞에 섰을 때 크리스마스 기분을 한껏 느끼다가도 뒤돌아서는 순간 그 무드와 즉시 단호하게 단절되기만 할 뿐, 어떠한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경험의 연속성이 이뤄지지 않는다.


올해 가장 눈길을 끄는 서울의 연말 명소인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외벽을 꽉 채운 크리스마스 미디어 파사드. 내년 1월 21일까지.


컨시어지가 게스트에게 의뢰받는 서울에서의 겨울 여행 패턴은 비슷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기본, 서울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눈 구경도 하며 겨울 액티비티를 할 수 있는 일정을 대부분 원한다. 물론 겨울에도 궁궐, 남산과 같은 기존 유명 관광지 방문은 유효하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눈 덮인 종묘를 종종 추천하곤 하는데, 종묘는 취향을 타는 곳이기도 하고 눈이 내려야만 종묘의 진가를 알 수 있기에 무작정 겨울이라고 쉽게 추천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계절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서울을 한 번은 벗어나게 되는데 이때 겨울 하면 떠오르는 강원도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당장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최소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에 게스트는 조금 망설이게 된다. 모든 일정들을 서울 안에서 소화할 수 있을 거란 예상을 빗나갔기 때문이다.


우리의 겨울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명소들은 참 멀리도 떨어져 있다. 덕유산, 한라산, 오대산, 대관령의 양 떼 목장, 인제의 자작나무 숲 등 아름다운 곳은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접근성이다. 물론 도시를 벗어난 여행은 언제나 목적지를 향해가는 굵직한 일정들의 연속이지만 내 여행이 아닌 겨울을 만끽하기 위해 온 외국인 게스트의 여행이기에 목적지와 목적지를 이어주는 그 여정까지 더더욱 즐거워야 한다. 여행하면서 이곳저곳 지나치며 경험한 사소한 것들이 모여 여정이란 공백을 많이 채우면 채울수록 여행의 완성도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게스트가 마주친 사람들, 지나치게 되는 맛있는 음식의 냄새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발견한 취향들까지 오롯이 여행의 일부가 되어 최종적으로 게스트의 여행을 완성시키게 되는데 이는 곧 서울이란 도시가 하나의 기억이자 각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게스트가 호텔을 나서는 순간 어떤 순간들을 마주칠지 컨시어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게스트가 그 여정 속에서 경험했으면 하는 것들이 있는 최대한 동선에 포함될 수 있게끔 목적지라는 ‘점’들을 동선이란 ‘선’으로 연결하는 게 컨시어지다. 이는 곧 여행의 완성도와 게스트의 만족도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게스트의 도시 경험을 완성시키기에 서울의 겨울은 단절되어 있었고 컨시어지에게도 유난히 추운 계절이었다.


네 개의 계절을 품은 이토록 재미난 서울이자 한국인데 선물처럼 주어진 이 계절감을 살리는 여행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여전히 유명한 랜드마크와 명소들을 앞세워 겉만 화려한 서울을 홍보할 뿐이다. 서울이란 도시에게 자아가 있었다면 분명히 서운함을 입 밖으로 가득 표현했을 것이다.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산과 바다까지 있을 거 다 있고 사계절마저 편들어주는 이 풍요로운 대한민국. 어떤 계절이 와도 지속이 가능한 여행과 관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우리만의 겨울 풍경들을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놔둘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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