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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May 24. 2023

섣불렀던 집 철거와 그새 벌써 산화된 꿈

제가, 저의 이 집이, 당신들을 난처하게 했나요?



"............... ,


어느새 깊숙이 곪아버린 오해의 끝이 

'안녕' 밖에 더 있을까요."


오직 침묵만이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답변 같았다.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아니 공(空)으로 돌아가버린 나의 집, 그 텅 빈 가능성의 공간을 매일같이 찾으며 해가 뜰 때, 해가 중천일 때 그리고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의 태양의 방향과 화창한 날, 흐린 날, 비가 오는 날의 제각기 다른 색감으로 공간 안에 스며드는 빛의 형상을 관찰한다. '주방 자리로 아침 볕이 꽤 깊구나. 오전 11시경부터 오후 3시까지 건물 정면으로 햇볕이 끊기질 않네. 다행이야.' 구석구석 종일 여기저기를 거닐며 마치 묵상이라도 하듯 이곳에 살고 있을 나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여기서 어떤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이 흘렀으면 싶은지, 어떤 향을 피우고 싶은지,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싶은지, 어떤 모습으로 잠이 들고 싶은지.


"어떤" 이란 질문에 넘쳐나는...."싶은지"에 담긴 내 오랜 간곡한 염원들. 


또 여기에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은지, 그들에게 어떤 차를 내어 주고 싶은지, 그들과 어떤 식탁을 준비하고 싶은지, 그들과 어떤 이야기로 소통하고 싶은지, 그들과 어떤 가치 있는 일들을 만들어가고 싶은지.




단순히 거주만을 위한 공간을 원한게 아니었기에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정서적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랬다. 폐쇄적인 집보다는 '관계가 벌어지는 열린 작업실'이랄까. 나와 비슷한 취향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얼기설기 모여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며 기쁘게 성장하고 외로움도 희석시킬 수 있는 그런 곳, 지금처럼 싱글인 나의 모습이든 추후 결혼한 삶이든 (행여 비혼주의로 남게 되더라도) 현재의 시간 속에 풍요롭고 단단한 내러티브를 지닌 곳. 18평이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지만 저 부쩍 높아진 박공천장과 여기저기 기이하게 뚫려 버린 벽들로 상상할 꺼리는 넘쳤다. 




"보내주신 이 견적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고객님!" 

(어머머 콜센터 상담 직원인 줄 알았잖아요.)


"......................."

(요즘 나는 카톡 글 속에서마저 침묵이 잦다.)




1억 2천2백만 원. 정확히 1억 2천2백만 원이 기재된 견적서가 보내기로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어 다음날 오후에서야 전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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