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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윗 Feb 24. 2024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두 곳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신학교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갈등이 심했습니다.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목회자가 되려면 신학교에서 배워야 함이 당연한 일이데도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큰 꿈을 꾸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왜 이런 공부를 이런 방식대로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해서라도 졸업을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해서 목사가 되면 목회자로서 충분할 것인지 늘 의문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는 이렇게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지가 늘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목사가 되는 길은 뭔가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늘 고심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다닐 때의 신학교에서도 똑같이 데모를 했고, 시험시간에는 커닝도, 과제물을 제출할 때도 남의 것을 빌려 베끼는 일은 일반 대학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몇몇의 신학교를 입학은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끝까지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이라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기회로 일본의 한 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신학교라기보다는 목회자 양성소 같은 분위기가 진했습니다.


학교는 입학날로부터 시작해서 졸업을 하는 3년간의 시일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죽는다 해도 집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끝까지 남아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는 교단의 센터교회와 기숙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보통의 일본교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편인데 도쿄에 있는 본부교회에는 수백 명의 교우들이 예배 전 한 시간 전부터 나와 기도를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학교의  매일의 수업은 두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청소를 하고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교수님과 본부 교회의 수십 명의 목사님들, 그리고 신학생들을 위하여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은 본부교회의 목사님들의 사역을 수종 드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주로 침례를 베푸는 일을 거들어야 했습니다.


침례를 주는 일은 평상시에도 상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자유시간이라고는 일과가 마친 저녁 시간에 신학생들이 모두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신학생들은 거의가 다 일본 전역과 다른 나라에 있는 교단 교회의 목회자들의 자제였습니다.

한국인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드리는 예배중심의 일상과 성경중심의 신앙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위탁과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었습니다.


수업이 있는 날 등교해서 수업이 마치면 하교하는 한국의 신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신학생의 일과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신학생 시절을 보내며 청소와 요리엔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일본전역에 있는 동문들의 교회를 방문해 보면 하나같이 교회와 사택은 반짝거릴 정도로 단정히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사가 된 그들은 모두가 목사로서의 지닌 품위와 사명은 성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신학교뿐만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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