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25일째) 금주(禁酒) 일기

by 하늬바람


나의 금주(禁酒) 일기 - 25일째


-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opening)

저번 편 23일째 이야기는 ‘비와 샤갈’ 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생기는 비극이고,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랍니다. 그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입니다.

예전에는 술이 저의 마음과 육신을 축축이 적셔주었는데, 오늘은 비가 술처럼 저를 충분히 적셔줍니다.

- opening 끝.


오늘은 여기부터입니다.


금주 25일째. 가장 힘들 때는 단연 회식자리에 참석할 때입니다. 웬만한 회식자리나 모임은 피하면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동안 술꾼으로 살아왔는데 술자리에서 술을 안 마신다는 건 곤욕이 될 거라 생각했고, 금주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회생활 하는 동안 나름 남들보다 잘하는 거라고, 잘 취하지 않고 마실 수 있는 음주량에 으쓱대기도 했고, 그다음 날 멀쩡한 모습을 은근 과시하기도 했더랍니다.

이 부질없는 부심과 남들보다 잘 마시고 즐긴다는 자만심으로 술자리 만남도 자주 만들고 어느 누구보다 술자리에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잘 노는 게 뭔지도 모르고, 속마음을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다 큰 어른이 된 뒤에는 친구나 동료에게 그냥 술이나 마시자며 시간을 보내고, 서로가 기억하는 감정풀이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게 그때의 감정으로 기억한다고 합니다. 니체가 말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망각이라는데, 그때의 일이나 세세한 장면은 잊어버리고 감정만 남는다는 거죠.. 그래서 ‘아 그때 그거 기억나? ‘ 하면서 기억을 헤매다가 다시 ‘에이 술이나 마시자.! 하며 술잔을 기울입니다.


김형경 작가의 "남자를 위하여" 라는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나서 그 글귀를 찾아 보았습니다.

"남자는 술이나 하자며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안부를 묻는 것이고 술잔을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를 위로하고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느낀다"

이분은 여성작가이신데 어찌 이리 남자들 심리를 잘 아시는지. . 좋은 글을 많이 쓰시는 분입니다.


벗들과 술을 마실 때면 가끔 술 한잔에 가볍고 소소한 이야기가 삶의 무거움으로 전해옵니다.

술 한잔에는 그 자체의 무게보다 그 술잔에 담겨있는 삶의 애환과 이야기들, 정겨운 벗들의 삶의 무게까지 담겨 한없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내 정신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져서 유체를 이탈하여 세상을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


에드워드 호퍼는 쓸쓸한 도시의 고독한 인간들의 모습을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유명한 미국 작가입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 마음 같아서 인지, 이 분의 그림을 많이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은 늘 쓸쓸하고 고독하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술 한잔하고 싶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술자리에 앉아 있지만, 누군가와 술을 마시지만, 채워지지 않는 고독이 내 모습 같기만 합니다.

(에드워드 호퍼. 293호 열차 C칸')


다시 금주기간의 회식자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금주를 공언했기에 술을 안 마시고 참석하겠다고 사전 공지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집요합니다.

아. 나도 저랬을려나?

술은 신의 물방울 이라고 떠들던 저였기에 마시지 않는 이유를 대충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제가 자초한 것이기에 변명할 생각도 없습니다. 분명 어딘가 아플 거라고 확증편향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주로 많고, 집요하게 이유를 캐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예 이상한 소설을 쓰기도 하고요..

그 정도까지는 다 괜찮은데 억지로 마시게 하려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오늘은 좀 마시고 내일부터 다시 금주 하라는 둥, 안마시면 서운하다는 둥 협박조로 들이대는 것도 부족해 애교조로 달라붙어 당면한 술자리의 일체감을 달성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들이 처절하기 까지 합니다. 원래 술마시면 비장해지는 법이니까요. 회사나 나라의 걱정이 술잔을 떠나지 않는 법. .


그런저런 상황이 맨정신으로 보면 다 재미있습니다. 다만 술을 안 마시니 많이 지루합니다. 사람들이 취하면 더 재미가 없어집니다. 술 안 드신 분들 어떻게 회식자리를 지켰을까요 존경심이 듭니다.


그런데 신은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른 선물을 주셨으니 그게 바로 ‘무알콜 맥주’ 입니다.

알콜은 거의 제로라고 보면되고 막주맛을 내는 게 관건인데, 메이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퀄리티가 상당히 좋은 상품들이 있습니다. 논알콜, 무알콜, 제로알콜 이런 식으로 분류되는데 미세한 알콜량에 따른 차이여서 잘 골라 마시면 됩니다. 술자리를 버티는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술을 안 마시니 자전거로 회식자리를 가고, 끝나고서도 자전거로 우중 라이딩 귀가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빗방울은 눈물방울처럼 슬퍼 보입니다.

자전거 길 위로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은 왠지 처량해 보이고, 빗물이 흘러 들어가는 맨홀뚜껑의 싸늘한 그 감촉이 내 맘에 전달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도시의 고독이 내 안에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술을 안 마셔도 감성은 늘 충만한가 봅니다. 음주로도 세상을 배우지만 요즘은 금주로 인해 배우는 게 많은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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