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과 문화적 실천
(내맘대로 문학기행)
번역과 근대 - 자기 정체성과 문화적 실천
요즘 브런치 스토리를 쓰다 보니 과거에 읽었던 고전 같은 책이나 명저를 다시 꺼내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책들 중에 저에게 잘 정리돼 있는 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책을 정리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후감. 서평. 리뷰 뭐든지 간에 써보는 거라는 게 제 지론 아닌 지론입니다만 모든 책을 그럴 순 없고 가끔 묶어서 정리하기도 하고 다시 들쳐보며 책을 읽던 그 시절 생각으로 돌아가보기도 합니다.
주말에 들쳐본 책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입니다. 이 책은 20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읽는 시간은 꽤 걸립니다. 요런 책은 두세 번은 정독해야 될 책으로 별도로 지정해 둡니다.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두 지성이 대화하는 걸 기록한 책입니다. 번역은 임성모 님입니다.
예전에 업무관련해서 일본법을 검토해 볼 일이 있었습니다. 관련 일본법을 한국어로 변환시켜 보니 토씨 하나까지 거의 똑같거나 비슷한 문장이 많이 나옵니다. 반대로 한국어로 된 법을 일본어로 번역해 봐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물론 문장구조가 유사하고 둘 다 어휘가 한자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 문장 자체가 거의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법률, 조직체계 등 사회구조체계를 그대로 받아쓴 결과이겠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로 가장 먼저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그동안 없던 단어들을 만들어낸 번역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흔히 사용하는 ‘개인, 인권, 사회, 물리, 자유, 평등, 부동산 ‘ 등의 한자 조어가 이때 만들어지고 개념이 정립되어 명문화된 법률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쓰는 단어는 일본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자 조어인 경우가 꽤나 많다는 의미입니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모든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근대화라는 말 자체가 서구화라는 말과 일치되게 같이 사용됩니다. ‘탈아입구’라는 유명한 구호도 있죠.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로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게 번역이라는 과정입니다. 메이지유신 시대 일본의 지배층, 지식층이 적극적인 번역주의를 주창하고 이를 실천한 과정이 바로 이 책에 담겨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언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번역을 통해서 기존에 없던 개념을 어떻게 정립 해나갔는가를 두 석학이 대화하는 형태로 묶여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대화라기보다는 '가토'가 질문하고 '마루야마'가 답하는 문답식 형태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동양에는 없고 서양에는 있는 두 가지가 바로 "인민 독립의 정신"과 "과학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크게 이 두 가지의 개념과 사상이 어떻게 번역되고, 단순히 언어의 번역이 아닌 사상과 체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룹니다. 서양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 두 가지를 중심으로 그동안 없던 개념을 조어하는 과정들이 심도 깊게 다루어지는데 기억나는 데로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현재 많이 사용되는 '인권', '민권'이라는 말을 조어할 때 일본어에는 단수와 복수라는 개념이 없는 데다 그때만 해도 권리라는 것은 천황이나 막부가 갖고 있는 것이지 개인이나 인민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인권, 민권이라는 말을 개념정립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단어의 번역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언어의 번역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상의 정립과 다른 문화와의 소통, 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걸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낯설기만 했을 서양과학을 접하면서 불교와 유교적 사상이 바탕이 되는 동양에서 기본사상이 되는 도리(道理)와 구별해서 물리(物理)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만든 과정도 다소 흥미로웠답니다.
음양오행이라는 경험적 지식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 즉 만물이 하나라는 동양사상과 달리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서 보는 서양적 관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과 그에 맞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게 됩니다. 동양에는 없던 뉴턴의 물리학과 다윈의 진화론, 열역학, 화학 등 등과 실험을 통한 증명이라는 과학적 방법 등의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번역이라는 과정과 사고의 정립이라는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 근대라는 건 해가 지고 뜨는 자연법칙과 같은 것일까요? 서해안에서 ~~~ )
번역에는 당시 많은 신조어가 필요했을 텐데, 그 신조어는 한자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번역에서는 표의문자인 한자의 장점이 부각되는 부분입니다.
한자를 활용하여 그 뜻을 결부시켜 새로운 단어를 조합해 낸 것인데 조어방법은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기존의 한자의미를 바꾸지 않고 조합해서 쓴 경우,
두 번째는 '자유'처럼 이전부터 있었던 한자어의 의미를 바꿔서 사용한 경우,
세 번째로는 '부동산'처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 경우입니다.
마지막 후기에 역자는 여기에 더불어 근대 중국어 가운데 종래 일본어에서 차용된 어휘라고 여겨져 왔던 것들 중 상당수는, 애초에 중국에서 선교사와 중국인들이 번역하면서 만든 것들도 많다고 합니다.
본래 있던 어휘들을 19세기에 일본이 다시 번역하면서 채용한 어휘가 의외로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다시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우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번역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는 것과 그 번역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의 관계 등 근대화라고 부르는 그 시기의 모습을 살펴보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현재까지 끼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근대어의 성립과정, 즉 서구어의 번역과정이 근대 자체의 개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의 서양사회를 모델로 한 근대화의 전제 중 중요한 한 가지가 광범위한 서양문헌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점은 그 번역의 과정을 통해 일본은 근대화할 수 있었지만, 근대화를 통한 문물의 발달과 더불어 서구의 제국주의적 성향까지 그대로 베끼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로 인한 그들의 침략전쟁과 욕망은 많은 국가와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작가 후기에 '가토'는 번역문화가 외국의 개념과 사상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항상 자국의 전통에 의한 외래문화의 변용이기 때문에 문화적 자립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항상 번역이 일방통행' 식으로 외국어가 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만 있었기에 문화적 고립,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합니다.
그 고립을 타파하고 국제사회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근대 일본이 선택한 수단은 우선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에 의한 자기주장이 실패한 이후는 경제력이었기에 문화적 소통 없이 계속 고립을 자초했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인다운 분석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자후기에서 이 책을 번역한 임성모 님은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긴장이라 함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많은 논의와 고민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정립된 어휘야말로 그 어휘를 사용하는 자들의 의식의 정립, 정체성의 구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언어의 정체성과 언어에 대한 긴장을 어떻게 갖고 살 것인지 고민하는 게 오늘 저의 결론이라면 결론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에서 번역의 힘이 얼마나 큰 건지 알게 되었고, K로 시작하는 한류 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우리의 언어, 번역, 문화는 어떻게 가꾸어 나갈지 긴장감을 가져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