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늑한 서재 Dec 02. 2021

05. 그날 밤.

- 밤은 신비롭지만 두려운 것.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

  나는 세 혈육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난 ‘아버지 부재중 태교’의 수혜자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아버지는 해외 출장으로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있었다. 너 가졌을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버지의 부재로 셋 중 가장 건강하게 태어나 총명하게 자랐다니.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탄생 서사가 난 달갑지 않았다.


  태교 덕을 보긴 본 건지 나는 유달리 호기심이 많았다. 잠귀도 밝았다. 다섯 살의 어떤 밤, 이웃집에 도둑이 들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집이 털렸을 때였다. 한밤 중 환하게 불이 켜진 집. 활짝 열린 대문과 현관, 창문으로 자개장이 있는 안방까지 들여다보이던 이웃집의 분위기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들이 여럿 와 있었고 잠에서 깬 동네 사람들은 잠옷 차림으로 나와 불안한 표정으로 수군댔다.


  어두운 거실, 마당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던 나는 어느 순간 공포에 질렸다. 당장 엄마에게 업어달라고 졸라댔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죄책감, 알 수 없는 수치심, 끝 모를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켰다.


  밤은 신비롭지만 두려운 것,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이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홀로 깨어날 때가 더러 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코피를 옷소매로 닦아내며, 치솟는 열을 느끼며 깨어나 홀로 밤과 대적했다. 엄마를 깨우는 것은 조금 있다가. 한밤 중 혼자 깨어 밤을 지켜본다는 것은 일종의 선행학습이었다. 밝음의 이면, 세상의 어둠을 미리 겪어보는 것. 두려움을 지켜보는 것.



Photo by Nik Shuliahin on Unsplash



  그로부터 10년쯤 지난여름 밤, 나는 또 홀로 깨어있었다. 부모님의 불화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버지의 맥주잔은 깨졌고, 마음 여린 엄마는 그날따라 분을 못 이겨 다소 극단적인 행동을 시도했다. 빌어먹을 밤의 신비로움은 그날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내 위 혈육은 절대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주 아팠던 동생은 절대 깨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오로지 나만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시절, 난 중학생 주제에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무기 하나 없이 그녀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꺼이 엄마의 불안을 쪼개 내 어깨에 한가득 짊어졌다.


  강한 척, 무섭지 않은 척, 의연한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간 홀로 밤과 대적했던 자기 주도 학습의 결과였다. ‘어둠과 불행도 삶의 일부야. 피하지 마. 이겨내.’ 미완성의 전두엽을 가진 사춘기의 패기는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날 밤에 벌어진 일은 한 편의 연극과도 같았다. 관객이었던 나는 어느새 출연자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연극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수많은 물음표를 가슴에 묻고 학교로 향했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 가는 건 좋았다. 거기서 내가 할 일은 단순했다. 친구도 많았고, 공부도 할 만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열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내 부모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아니 못한 걸까. 습관처럼 밥을 입에 떠 넣으며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아버지의 기분에 다른 가족들의 기분까지 결정되던 매일, 어두웠던 일상. 사랑하지만 꼭 그만큼 미웠던 엄마. 그러나 나는 다른 날과 어김없이 도시락을 다 비웠다.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과 사랑과 빛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곳에 있고 아직 찾지 못한 것일 뿐. 지금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나는 믿었다.


  다시 다섯 살의 나. 혼자 동네 구경을 나갔다가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공기의 흐름은 뒤틀렸고 겁먹은 나는 한 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억나는 건 분홍 원피스를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내가 주먹을 꼭 쥐고 했던 생각이다. ‘괜찮아, 난 집을 찾을 수 있어.’


  마른침 한 번 삼키고, 감각에 의지해 나는 집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좁다란 골목을 몇 개나 지났을까. 코너를 돌자 제법 골목이 넓어졌고 우리 집, 파란 대문이 보였다. 나는 다행히 집을 찾았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지켜야 할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두려운 순간은 여전히 많다. 그럴 때면 다섯 살의 나를 떠올린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작은 주먹 불끈 쥐고 용기를 냈던 어린 내게서 힘을 얻는다.


  이제는 이해한다. 그 시절의 부모님을. 서러웠던 두 분의 삶 사이에서 찐빵처럼 눌려 터졌던 10대의 나 또한 위로하고 보듬는다. 그리고 난 결국 집을 찾았다. 사랑과 행복과 빛나는 어떤 것들에 둘러싸인. 모두를 위한 연극이 펼쳐지는. @



- '일상에서 에세이 쓰기' 한겨레 문화센터 / 과제2 '어릴 때 내게 일어난 가장 중대한 일' 

작가의 이전글 04. 벌써 내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