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처가 식구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오래간만에 한적한 야외로 나갔다. 협착증으로 일 년 넘게 고생하신 장모님과 6번째 항암 치료를 앞둔 처형을 위한 자리였다. 경치 좋은 곳에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이 반가웠는지 장모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곧잘 같이 모여 식사를 했는데, 어느새 그 아이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다 보니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장모님은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딸과 어린 손자, 객지에서 일하고 있는 큰 손자까지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음식을 앞에 놓아주려고 했다. 장모님에게는 하나같이 아픈 손가락이었다. 장모님의 챙겨주려는 말과 행동은, ‘괜찮으니 그냥 드세요’라고 말하는 처남과 부딪쳤다. 손자들뿐만 아니라 딸들도 모두 알아서 먹고 있으니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된다고 한사코 말렸다. 장모님은 더는 어미 새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싱싱한 촌닭은 다슬기 국물 속에 넣어 고와지듯 끓고 있었다. 앞접시에 놓인 닭고기를 드시다가 장모님은 불현듯 닭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는지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 듣다 보니 장모님의 이야기에 다들 시큰둥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잘 맞춰지지 않아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진 젊은 조카들의 이야기에 장모님의 이야기는 묻혀버렸다. 옆에 있던 처형은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어’라고 하며 장모님을 거들었다.
지난주 부모님을 뵈러 서울에 갔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사시는 두 분이 안쓰럽고, 건강이 예전만 못해 매달 찾아뵙고 있었다. 막상 부모님 댁에 들어가려고 하니 불편한 마음이 다리를 붙잡았다. 아버지, 어머니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지지는 않았는지, 두 분의 사이는 괜찮으신지…. 지난달 안 좋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눈이 안 보이시고 어머니는 귀가 어둡지만 그나마 건강이 좋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일상을 돌보신다. 어머니도 점점 힘들어하신다. 살았던 날도 살아갈 날도 두 분에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와 곧잘 대화를 잘했었다. 어머니는 딸들보다 아들인 나와 대화하기를 더 좋아했었다. 사춘기 때도, 대학에 들어가서도 친구처럼 나의 일상과 어머니의 일상을 서로 이야기했었다. 나의 고민거리에 대해 어머니께 조언을 구하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했었다. 그런 대화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끊이지 않았었다. 이제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힘들다.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는 어느새 설교적, 교훈적 말씀으로 변해갔다.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이야기다. 거기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옛날 가지고 있었던 생각으로 세상을 재단하신다. 당신의 젊은 시절 고생담, 살림을 일으킨 성공담을 늘 반복하신다. 문제는 다른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하려고 해도 어머니는 반응하지 못하신다. 티키타카가 잘 되었던 30년 전 어머니의 모습을 더는 찾을 수 없다.
나이 드신 어머니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는 척을 하지 못하는 나의 고지식함과 부족한 효심을 반성한다. 그냥 듣고 그러시냐고 하면 되는데 굳이 그게 아니라고, 세상이 바뀌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옛날 사셨던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활하시니 여동생과도 자주 부딪힌다. 아내도 힘들어한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어느 순간 어머니는 고생했던 옛 세상 속으로 되돌아가시어 사시는 것 같아 답답해진다.
나이 들수록 고집이 세진다고 한다. 얼마 전 읽은 ‘100세 수업’에서 나이 들수록 스스로 자신이 아직 가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인정의 욕구’, ‘자기 가치 증명의 욕구’가 있어 그런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젊은 시절 잘했거나, 칭찬받았던 행동을 계속함으로써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고집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 부정정서(우울, 슬픔 등)를 최소화하고 긍정정서(행복, 기쁨 등)를 최대화하려는 정서적 최적화로 안정감을 느끼려고 한다고 한다. 새로운 경험과 생활방식의 수용에서 오는 불쾌함, 실패감을 느끼기 싫어 더 경직되고 고집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기사 ‘했던 말 또 하는 라테 어르신... 행복 찾는 인생 되새김질 중입니다.’라는 기사를 보니 어머니가 했던 경험담, 성공담을 왜 계속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과거에 기억했던 장기기억 내용은 잘 보존되어 기억하지만, 해마와 전두엽의 기능이 노화되어 정보를 조직화하고 정교화하는 인지 능력은 감퇴한다고 한다. 바로 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해, 했던 이야기를 또 하지만, 옛날 일은 잘 기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의 경험은 미화하여 그래도 스스로 잘 살았다고, 그때가 좋았다고 스스로 위안으로 삼으며 정서적 최적화로 만족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윤복의 ‘감옥으로 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릴 것을 권했던 부분이 생각이 났다. 나이 들었다고 세상일에 무관심하지 말고 홀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자주 사람과 교류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그의 내용이 지금 떠 오르는 것은 어머니께 조금 더 일찍 이런 내용을 알려드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물론 듣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아내와 대화 중에 어머니와 장모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저렇게 되면 안 될 텐데....,’ 아내의 우려에 공감이 갔다. 그분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노화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신적으로 사랑을 주셨던 부모님이 생각지도 못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당황스럽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그분들이 겪는 서운함과 아쉬움, 외로움을 그 누가 알까? 외롭게 사그라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속절없는 인생이라 눈가만 축축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