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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Nov 11. 2024

팬심(fan 心)을 갖고 싶다

- 아줌마 부대를 보고서

 지방의 ○○산업 엑스포에 갔다. 평일 오후라 사람들은 많지 않다. 무심코 행사장으로 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여성이 ○○○ 팬클럽에 가입하면 선물을 주겠다고 한다.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중년 남성에게 팬클럽에 가입하라고. 그것도 어린 남성 가수를. 어울리지 않는 권유가 실없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남성에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고 가는 아줌마의 당당함이  재미있다.


 조금 걸어가니 여기저기 50-60대 중년 여성들이 흰 후드 티와 흰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등에는 검은색으로 ○○○ 이름이 쓰여 있어 무슨 선거 유세를 하러 나온 사람인 줄 알았다. 대형 안내 포스터를 보고 후두 티에 쓰인 초청 가수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았다. 모자와 티셔츠에는 가수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각종 액세서리가 앙증맞게 붙어 있다. 어린 남성 가수에 대한 팬클럽 여성의 애정은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대중매체에서 듣던 아줌마 부대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신기했다. 어릴 적 오빠부대가 떠올랐다. 키 크고 잘 생긴 외모의 남자 가수가 히트를 치면 조만간 오빠부대가 등장했다. 오빠부대는 대개가 교복과 가방을 멘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었다. 사춘기 꿈 많은 시절, 백마 탄 왕자를 꿈꾸며 이상적인 남성에 대한 동경으로 아이돌을 따라다니는 모습은, 그 시절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돌고 돌아 그 시절 오빠 부대가 아줌마 부대가 되어 나타났다.


 축하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 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기다리던 흰색 후드 티 아줌마 부대는 들뜬 표정으로 가수를 맞이한다. 어린 남자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며 공감을 유도하는 질문을 시작한다.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그녀들은 연신 예, 예하고 답한다.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데 알아서 척척 간주 사이에 가수 ○○○ 이름을 부른다. 다음 간주 사이에는 엔돌핀이라 구호를 외친다. 사전에 연습을 한 것인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불란하다. 가수보다 더 신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보고 있는 나도 엔돌핀이 돋았다.



 

아줌마 부대의 신이 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남자들은 왜 저렇게 안 될까. 어떤 가수의 팬이 된다는 것이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남성도 못할 것은 아니다. 중년 남성의 아저씨 부대에 합류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주책이라는 아내의 구박과 스스로 느껴지는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어린 여성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하고 행사장으로 간다. 청바지에 팬클럽 상징인 빨간 티셔츠를 입으니 튀어나온 배를 감추기 어렵다. 모자챙 위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내려쓰고 행사장을 활보한다.


 길 건너 쪽의 다른 아저씨들이 여자 가수의 이름을 등 뒤에 새긴 빨간 후드티를 입고 팬클럽에 가입하면 선물을 준다고 목청을 높인다. 무대에 오른 어린 여성가수는 섹시한 춤으로 단번에 남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나이 든 아저씨들은 저마다 휘파람을 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안 되는 춤을 나도 따라 해 본다. 민방위 위문 공연하러 온 것도 아닌데 ‘우정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듯 몇몇 아저씨들이 무대 위로 오른다. 잠시 후 무대는 빨간색 아저씨들로 정신이 없다.


 말도 안 되는 내 상상에 웃음이 나왔다. 상상력의 한계인지, 여성 아이돌 가수에 빠진 남성들을 보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수컷 본능을 가진 남성의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아저씨 부대가 생기면 아줌마 부대와 달리 민폐가 될 것 같다. 머리 허연 아저씨들이 몰려다니는 것도 그렇고, 협력과 소통으로 움직이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서열과 경쟁으로 상하관계를 만들려고 하기에 아저씨 부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남성은 게임, 운동 등 취미 활동의 동호회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아저씨 부대를 상상했던 것은 아줌마 부대가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평일 오후에도 시간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펜심이 대단하다. 먼저 가수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들여 꾸미고 각종 행사에 따라다니며 기념품을 골고루 구매할 여유가 있다. 둘째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가수 때문에 모이고 팬클럽을 만들어 소속감을 갖고 서로 공감하고 공유하는 네트워킹이 잘 되어있다. 셋째는 좋아하는 가수를 위한 적극적인 자세이다. 아들뻘 되는 어린 남성 가수를 좋아한다고 선포하고 남들에게 팬클럽에 가입하라고 적극적으로 안내하는 행동이 부럽다. 좋아하면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이는 50-60대 아줌마 부대를 정체성을 잃은 여성이 감각적 만족을 위해 대중문화의 소비프레임에 빠진 것이라고 한다. 여성은 폐경기를 지나 갱년기를 겪으면 여성의 매력을 잃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요당한 삶을 살던 여성들은 안타깝게도 주체적으로 살아보지 못했다. 한국의 중년 여성들이 대중매체의 오락상품에 빠져 일시적 만족으로 시름을 달래는 것이고, 자본주의 소비프레임에 세뇌당한 결과로 무의식적 행동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체성의 혼란이든, 가족들에게 헌신하고 난 후의 공허감이든,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속에서 새롭게 타인과 네트워킹을 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는 팬클럽 아줌마 부대가 좋아 보인다. 나이가 들면 점점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그러기에 앞서 밝고 젊게 살려는 여성들의 활동으로 보인다. 신이 나서 재미있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행복해하는 아줌마 부대의 모습이 뇌리 속을 맴돈다.


 요즘 들어 좋아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이 감흥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나온 시간 속의 경험이 역치를 높게 만들었는지 웬만하면 반응하지 않는다. 예전과 달리 영화도 끝까지 보기 어렵다. 스토리가 뻔한 것 같아 집중하기도 어렵다. 음악도 익숙한 멜로디의 곡만 듣게 된다. 내적 충만감을 찾으려고 하지만 때로는 과거 활발했던 외적 활동이 그립기도 하다. 아줌마 부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팬이 되어 활력 있는 삶에 빠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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