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죄

by 박경이


둘이 같이 우리집에 올 때면 M은 꽃밭부터 조금 둘러보지만 H는 곧장 집안으로 들어간다. 빨리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 한단다. 내가 내린 커피가 제일 맛있다는 M. 맞는 말이다, 후후. 맛있는 커피를 골라서 보내주는 제자가 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마침 어제 진숙이가 보낸 신선한 커피가 있다. 오늘 손님 올 줄 알고 보냈다고 자랑하며 커피를 간다. 따스하게 구운 빵에 오디잼, 보리수잼 발라 품평하며 먹는다. 달콤새콤 잼과 고소한 빵의 만남에 호들갑을 덜어주는 커피. 커피와 빵은 언제나 어울리는 친구지만 우리의 수다가 더해질 때는 완벽해진다. 가끔 맥주를 마실 때도 커피는 빠지지 않는다. 종종 커피잔을 들고 이층에 올라가기도 하지만 주로 부엌의 둥근 식탁에서 몇 시간 붙박이다.


있잖아, 그저께 내가 뭘 좀 따져 물었더니 남편이 이러는 거야.

“그렇게 책 읽어서 고작 이거야?”

나도, 나도. 우리 남편도 그랬어. M의 말꼬리에 딱 붙어 나온 H의 말이다. 우리 남편도 이러더라고,

“공부해서 뭐 변한 게 있어?”

똑같애, 똑같애. 눈이 동그래지면서 화통한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내 남편도 곧 그 말 하는 거 아냐? 세 사람이 일치한 듯 완벽한 순간이었다. 곧 미세한 이동이 따를지라도 그것이 더 넓어질 뿐인 교감이자 공감의 상태.


아내가 예전같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잖아? 그럼 책 읽어서 자기한테 더 순종하기를 바랬던 거야? 여전히 전담하여 밥하고 반찬 만들고 설거지에 청소하고 구석구석 정리하면서? 독서를 통해 초월적 깨달음을 얻고 더욱 즐겁게 희생하라고~? 그래서 남편은 책을 안 읽나 봐. 자기가 변해서 청소기 돌리고 요리하게 될까봐? 하하하 드라마만 봐. 영화만 보고 또 봐. 정말 뭘 모르네. 알아도 모른 척 꿈쩍 않는 거지. 맞아, 철벽 콘크리트. 그런 남자 많지. 그런데 정말 어이없다. 자유로워지려고 책 읽는 거 아냐? 가부장적 질서에 더 매이게 하는 책을 우리가 이 나이에 왜 읽어? 평생 그렇게 산 줄도 모르게 살았던 게 지금 후배들에게 미안하구만. 맞아, 우리더러 가부장제의 지킴이라고 딸들이 했던 말을 이제야 좀 알겠어. 전엔 억울하더니. 그러게~


어쨌든 전과 다른 걸 알긴 아네. 뭔가 불길한 걸 느끼는 거겠지, 아니 위기감? 하하하 불길不吉, 불길이 맞네. 누구에게? 남편! 흐흐흐. 사실은 그 불길이 살 길인데. 아이고, 그거 진짜 말 된다. 더불어 함께 살 길, 평등평화 넘치는 길. 그러게 진짜 기가 막히네.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지? 안 하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강화시켜놨잖아. 맞아, 이제 와서 어쩌냐, 클났다. 난, 꽤 잘 싸우며 적당히 일도 나누고 시키며 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맞아, 이거해라 왜 안하냐, 지적하며 요구하기는 커녕 돈까지 같이 벌면서 모든 걸 다했더라니까?


어쨌든 하여간 자기 아내가 변한 걸 알고 있다는 말이야. 그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하고 갈수록 유리한’ 변화가 아닌 거지. 더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갈 수 없음을 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결국 남편 자신도 변해야 할까봐 겁난다는 거 아닐까? 그럼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겠네. 참 해석 잘도 좋게도 하네. 그럼 서로 잘 변할지도 모르는 거야. 부디 그러기를. 내 남편이니까! 과연 그럴까? 아이고, 눈에 까풀이 아직도 튼튼하네. 하하하. 맘먹고 남편이 더 먼저 빨리 변하는 거 아냐? 제발 그러라고 해. 하하 그렇게 되겠네. 그럼 복 텄네~ 훌륭한 남편들이네, 하하하.


아내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말에는 남편의 두려움과 패배감이 담겨있다.

가부장제의 비밀 가운데서도 핵에 다가가는 아내가 두렵다는 뜻이다.

만만하던 아내가 눈 똑바로 뜨고 의문을 던지는 게 무섭다는 거지.

잃어버릴지도 모를, 갈수록 줄어들 것임이 분명한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염려다.

빤한 말이나 장미 한 송이, 부릅뜬 눈으로 때울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분노다.

기득권, 말이 낡아 뜻도 낡은 것 같지만 그 말이 포함하는 부당한 권리는 어마어마하다. 아직도 많은 남편들이 이미 자신에게 배정되어 당연히 누렸던 모든 권리가 얼마나 엄청났던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내들의 말에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돈도 벌어왔으며 아내에게 욕하거나 때리지도 않았는데 억울할 뿐인 남편들이 많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다'. 집안일도 많이 한 것만 '같다'. 해야 한다고 사회가 요구하지 않았으니 몇 가지만 해도 대단한 것 '같이' 여겨질 것이다. 남자들은 시늉만 해도 칭찬받는 세상에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으'리라.


일방적으로 편하던 이전의 관계방식을 고수하려는 방어적 몸부림임과 동시에 자신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음을 저절로 인정하는 무의식의 발언은 이제 그만. 자신이 누린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일이다. 하느라고 했어도 몰라서 못한 것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할 때다. 몰랐던 게 면책 사유가 아님에 대해서도.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서도. 오직 여자들의 외침에 귀기울일 때, 대화하고 생각할 때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변화에 대한 인식은 진짜 자기 변화의 시작이자 신호다. 대단히 크고 중요한 한 걸음을 떼고 있는 거다, 자신도 모르게. 마침내 변화의 필요성과 가치에 승복하면서 권력과 책임을 나누겠다는 선언인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유익한 변화를 위해 깊이 독서하고 사색한 아내에게 감사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성큼 앞질러 긍정적 해석을 하자. 미안해서 돌려 말했던 거라고, 수천 년 봉인된 문이 열리고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라고. 암만, 영원히 빛을 가릴 수는 없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자신의 태도를 인정한 거라고 믿고 길게 가는 거야. 계속 자신의 편리함을 연장해보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도 알거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며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 알아가는 중일 거야. 죄라면 모른 척한 죄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 않는 죄는 중죄다. 시간 걸릴 테지만 이미 수십 년 살았는데 그보다 길겠어? 앎과 변화와 실천으로 가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잘 수 있을까? 너무 갔나, 과대해석인가? 이런 시작은 반이 아니라 반을 훨씬 넘을지도 몰라.


M과 H는 새빨간 미니장미 가지 두셋 꺾어 들고 갔다.

작다고 가시가 없는 게 아니라 더 따끔따끔하다.

절정을 넘기고도 꾸준히 피는 장미가 쉴 때

쉬면서 다음 해의 가시를 준비할 때 국화가 핀다.

찬 서리 속에서도 얼지 않고 피는 국화,도 피를 가진 걸까.

사람답고자 애쓰는 사람들처럼 뜨거운 마음을.

자신의 못난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무늬처럼 지닌 채 그러나 그것을 넘어

좀 더 나은 자신으로, 이전과 달리 살아보려는 멋쟁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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