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킴! 그리고 사울
1
최근 5년 넘게 드라마에 푹 빠졌었다. 꺅! 멋진 인물들을 많이 많이 만났다. 찌질이들과 쓰레기들도 역시 많이 만났다. 어쩌면 그렇게나 못나고 못돼먹을 수 있는지 한편 더 멋져부렀다! 나도 가졌으나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해석의 대상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와 너무 다른, 다르나 비슷하며 비슷한 듯 엄청 다른 무수히 많은 삶의 층들을 보고 켜켜이 마주했다. 내게도 가능했으나 잃거나 도리 없이 놓친 부분, 또는 영원히 상상불가의 면면을 마주하며 가슴 벅찼다. 모니터 앞을 떠날 수 없는 정물이 되었다. 그 바람에 몸은 엄청 부실해졌으나 무수한 영혼을 들이마신 내 마음은 통통해졌다. 살진 정신에 튼튼한 몸이 곧 깃들 것이다!
<위기의 주부들>, <섹스 앤드 시티>, <프렌즈>와 <크리미널 마인드>로 시작하여 일단 장편으로만, <굿닥터>, <아웃랜더>와 <종이의 집>까지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정신없이 신나고 바쁘게 살아보았다. 눈알이 빠지도록 울고 목덜미가 결리도록 웃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결혼하고 이혼하고 조마조마 관여하며 안달박달하고 도전하고 싸우며 후회하고 죽이고 짓밟는가 하면 세상을 돕고 지구를 살리면서 내가 살지 못한 모든 삶을 겪었고 시간과 장소를 살아보았다. 배우들의 국적과 인종의 다양함에 힘입어 기쁨이 고루 더했음이 더욱 고맙다. 모든 직업을 가져보았고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다. 정말 신났더랬다. 내가 살 수 있었던 내 삶에서 물러나서 나와 인간에 대해 알아가던 끝에 이렇게 보낸 시간은 이전에 내가 주도했던 내 시간만큼 힘차고 아름답고 더 새롭게 살았던 한 때였다. 그러니 드라마에 빠진 것은 삶에 빠진 것이며 나 자신에게 빠진 것이다. 무수한 사랑에 풍덩 몸을 떨군 것과 마찬가지다.
이럴 줄 몰랐다, 정말 몰랐다! 난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귀신이 무섭고 피가 끔찍해서, 수술장면이 징그러워서, 총칼이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해서 또는 이런저런 장면이 억지 같거나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하다거나 뻔하고 틀에 박혀서 등의 이유로 드라마가 싫었으니 보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을 수밖에. 적절한 좌절을 겪으며 양육된 심신 ‘건강한’ 사람들은 그런 건 취향의 문제라는 공식 같은 한 마디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는 이른바 인간의 ‘취향’이라는 게 어떻게 그리 다르게 형성될 수 있는지가 먼저 궁금했다. 그리고 ‘적절한’ 좌절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인간에게 적절,이란 게 가능한지도. 그리하여 내 안에 부쩍부쩍 솟는 호기심이 살살 불러내고 일으키는 재미가 볼수록 더한데 마침 한꺼번에 몰아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그건 선물 보따리였다. 창작자와 제작자들, 기술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감사를 바치며 보니 더욱 좋았더라.
2
<그레이 아나토미>, 천국같은 병원, 환상적인 인생상담소. 퍽 치밀한 인과와 어긋남으로 고개를 끄덕이도록 연결시켜가는 삶의 장면들, 중요한 현안적 발언을 아끼지 않는 매혹적인 인물들, 무수한 인간형과 삶의 지형들을 생생히 실시간으로 눈앞에 제시했다. 미란다 베일리처럼 메러디스처럼 크리스티나처럼 에이프럴처럼 웨버처럼 데릭처럼 알렉스처럼 윌슨처럼... 쓸 이름이 너무 많다, 모두 쓰고 싶다. 해석하고 해부하며 들여다볼수록 사랑하게 되는 인물들. 드라마에 빠지는 게 별로 폼나 보이지 않아서 영어공부 어쩌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슬그머니 보기 시작했던 건데 자막 읽는 속도가 경지에 이르면서 한글을 더 사랑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하우스 오브 카드>, <프리즌 브레이크>, <나르코스>, <소프라노스>, <트루 디텍티브>, <Mr.메르세데스>, <24>, <슈트>, <지정생존자>, <범죄의 재구성>, <워킹 데드>를 줄줄이 부르며 경악과 절망, 가능성과 기쁨의 잔들을 무수히 들이켰다. 그들의 죄악과 매력 일부를 내 것인양 구경꾼이자 참여자로서 뜨겁게 맛보며 뿌듯하고 보람찼다. 남이 가진 특성이나 재능과 갖가지 생겨먹음으로 가능한 모든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나뉘고 뒤섞이는 가치가 지금 창조된 것이기나 한 듯 몹시도 새로웠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살아보지 못한 삶의 층들이 가슴을 헤집으며 달려왔다. 드라마 속의 시간을 생생한 평행으로 함께 달리면서 내가 놓고 온 시공간들을 되짚어 마음껏 살아냈다. 나의 불가능과 떠나온 자리를 애도하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총을 들고 망설이는 인물에게 ‘쏴, 죽여!’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을 때는, 거인이 나를 번쩍 들어올리는 듯 거인과 함께 나도 커지는 듯. 오오, 나는 램프를 깨고 나온 거인. 죽여! 그것은 나 스스로를 향한 명령이었으니 내가 죽여야 했던 건 무엇인가. 갖은 불안 위에 부유하는 무서움과 피와 폭력의 끔찍함과 걱정근심이 전무한 놀이동산! 현실과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들락날락하면서 중독과 몰입의 차이를 터득했던 전지전능의 시간.
오오, <브레이킹 배드> 월터쌤, 제시! 마이크! 프링.. 이걸 볼 때는 앞의 모든 것을 잊고 이 이상의 인물이나 드라마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터 콜 사울>의 진 태커빅이자 사울 굿맨이자 지미 맥길에을 만났을 때는 다시 할 말을 잃는다. 그 짝꿍 킴벌리 웩슬러는 어떤가. 메러디스의 독보적 위치를 킴에게 기꺼이 넘기며 최고의 캐릭터라고 흥분, 반하다!! 엉큼하도록 엷게 무수히 겹친 인간의 양면성이자 다면성을 일상에서 이토록 천연덕스레 보여줄 수 있는지 감탄하는 나. 결국 도덕적 결말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누명,을 쓸까봐 걱정될만큼 인간으로서의 자리 또는 ‘충동’에 대한 사유를 <워킹 데드>와는 달리 조용히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레이킹 배드>를 다시 보고 두 작품의 사건의 배경과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듯 연결시키는 동시에 그 구성과 배치에 거듭 감탄하며 <베터 콜 사울> 역시 다시 보아야 했다. 마침내 6부를 기다리며 난 초대받지 않은 자로서 제작에 원격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멋진 짝꿍을 각자 또 함께 완성하기 위한 결말을 얼마나 숙고했을지, 나는 제작진의 토론 과정을 나대로 혼자 상상으로 겪으며 재밌기 짝이 없었다. 창작이란 이런 거다. 후후 나 지금 너무 신났다, 퍽 고요하던 내 안의 모든 아이들이 날뛴다. 놀아요~~ 흥분! 눈 빠지게 기다리던 6부 방영이 시작될 때 얼마나 기쁘던지. 그 덕분에 모든 날들이 흐뭇하던 기다림의 화요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존중감이자 놀라움과 샘솟는 즐거움에 빠진 여럿의 나들로 가득한 삶에 다시 빠졌던 거다.
3
재미와 호기심을 거느린 채 삶 전반에 대한 무수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내 생각과 감각과 정서의 면면을 찾아 실마리를 쫒을 때 그 즐거움은 대단했다. 살아보지 못했거나 거부했던 삶의 면면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이제라도 알고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감사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수용으로 마음과 생각이 계속 열려나갈 때 참 뻐근했다. 진작에 좀더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넘은 한계 인정이었다. 받아들임과 화해에 이르기, 한 겹 더 진정한 승복이었다.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만이 비로소 단박에 가능한 그 내려놓기였다. 삶이 곧 애도,라고 해석할 때 나는 그러므로 얼마나 충분히 다시 살 수 있었던가. 그러니 얼마나 의미있는 시간이었던가. 먼 길을 돌고 돌았다고 생각했으나 내게 가장 빠른 나의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한없이 먼 우회로처럼 보인 나만의 지름길로 나는 제 때 내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자 무서워서 하지 못했으나 이제라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수영에 점 한 번 더 찍고 고작 범핑카? 그리고 사격장! 총 쏘기의 강력한 쾌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한 방에 날리면 될 것을 바늘구멍 수천 개를 내면서 겨우겨우 숨 쉬며 살았으니 쯧, 깜냥이 안된다는 말의 딱 들어맞는 의미를 붙잡은 거다. 깜냥,도 그릇,이랄 수도 없지만 다른 의미를 상상하고 확장해 느끼기 위해서 마구잡이 비교와 단순무식 대조도 가끔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페러글라이딩과 스카이다이빙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바이킹부터, 청룡열차부터 시작하자고 결심한 어느 날 백수 친구한테 에버랜드 가자니까 그건 싫단다. 무서워서 절대 못 탄단다. 아니, 너도? 너처럼 도전적이고 망설임없는 사람이? 놀랄 일은 끝이 없다. 인간이,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이다. 바다수영 4킬로미터를 두 번이나 완주한 친구에게 물어봐야겠다.
4
스물넷, 아이들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새내기 교사는 가르치고 배우며 또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연극에 빠지고 교육운동에 빠졌다. 모둠수업, 매체활용 수업으로 아이들과 신나게 생활하면서 만화에 빠지고 도서실수업에 빠져 토론하고 게임하며 공부하고 노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래서 『만화 학교에 오다』와 『천방지축 아이들 도서실에서 놀다』를 썼다. 그리고 강의를 통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전하는 기쁨에 빠졌던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놀기가 더이상 즐겁지 않을 때, 남 가르치는 일을 충분히 했다 싶을 때 학교를 떠났다. 이어서, 정신분석에 빠짐으로써 누구도 아닌 나에게 빠지게 되었다. 나를 가르치며 내 삶을 돌아보는 여정에서 나를 알아갈수록 인간이란 존재에 빠졌다. 그 길 위에서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았음을 깨우치는 시간들을 가졌으며 『엄마 꽃밭은 내가 가꿀게요』를 썼다. 이제 나는 내가 되었고 나를 더 쓰는 일에 빠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발견과 깨달음의 언어로 기쁨을 주었던 책들을 다시 더듬는 즐거움에, 새로운 사유를 부추기는 공간과 말들을 만나는 기쁨에 빠져도 좋겠다.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에 빠진다. 빠진 줄도 모르고 빠져서 잘 산 줄 알았으나 죽어 살았던 날들이었음을 깨닫는 엄청난 날들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며 그것을 깨닫는 일에 빠질 수 있는 엄청난 행운을 스스로 만들어 낼 때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빠짐은 그 이전의 빠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듭 죽음으로써만,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어릴 적에 충분히 빠졌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무엇에 또 빠지게 될까. 빠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빠져 있을걸, 빠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걸. 사는 게 빠짐이며 빠져야만 살 수 있는 걸. 이미 무엇인가에 빠졌으며 살랑살랑 빠져 나오고 있는 중일 거다. 빠져나온 뒤에야 비로소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죽음으로 완성되기까지 나는 걷는다,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