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에 빠지다

쉰셋 원더가 태아 원더에게

by 박경이

1

나는 무서운 게 많았다. 특히 물을 무서워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한참 후의 일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금강가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서해안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수영을 못할 뿐 아니라 물놀이도 별로였다. 목욕탕에서도 물속으로 미끄러질까 은근 겁났으나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난 그런 사람인가 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문득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정신분석 공부를 하면서 내 장단점을 비롯한 특성에 대해 면밀히 돌아보는 과정에서 내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매우 공포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자 물과 친할 수 없도록 영향을 미치거나 물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법한 사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물을 무서워할 뿐 아니라 습기를, 꿉꿉한 것도 아주 싫어한다는 것도 인정했다. 보송보송한 것에서 평온을 느끼고 슬픔조차 ‘잘 마른’ 것을 좋아한다는 걸 수용했다. 나아가 일상의 곳곳에서 그것들에 대한 불편감을 수시로 견뎌야했던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했다. 동시에, 참 오랫동안 잘 참아왔다고 스스로 눈물어린 칭찬도 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전달될 수밖에 없었을 내 불편감을 조용히 참아주었을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건 깨달음의 과정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난 그게 참 좋았다. 물론 나 또한 어느 부분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그랬을 거라고 끄덕끄덕하는 뿌듯함, 그것은 다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따뜻한 미안함으로 순해지는 마음을 느끼는 일이 참 좋았다. 진짜배기 삶의 맛이고 멋이구나 싶었다. 남 덕에 산다는 말 하나의 깊이와 넓이만큼은 제대로 새기게 되었다고 큰소리 칠 수 있다. 흠.


신기한 일은, 그렇게 원인이라 할 것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는 동시에 한 인간을 만든 구조로서의 병리적 특성을 완전히 인정하자 물이 덜 무섭더라는 것. 발목을 잡아당기던 두려움을 제대로 인식하고 나니 그것에 사로잡히는 강도는 아주 약해지고 없는 거나 마찬가지. 무섭다는 것은 반사적으로 뜨는 고정된 표현일 뿐 몸의 거부반응은 훨씬 덜했다. 휘둘리지 않는다. 물이 금방 좋아질 리도 없지만 몸이 위축되지도 않으려니와 괜찮다는 생각이 스르르 드는 게 신기했다. 수영을 배우고 싶어졌고 명퇴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11년 째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하게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


2

그래서 수십 년 싫어하고 무서워한 것을 바꾸기는 참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박한 해석일 뿐이다. 이제 내게는 수영의 필요성도 관심도 없어졌음을 알았다,고 할까. 나는 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빠져 죽지 않고 탈출한 것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헤엄치고 있었던 거다, 이미. 나름 충분히, 살만큼.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진실로 내가 몰랐을 뿐 나는 수영을 할 줄 알았던 거다. 그러니 수영을 뭐하러 또 배우겠는가. 이미 지쳤고 힘들어 죽겠는데. 게다가 이제 물과 익사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는데. 장애물이 없어지면 맘껏 사랑하게 될 줄 알았으나 오히려 사랑이 식은 것, 오오!


이제 슬슬 진짜 수영을 배워볼까, 진정 맘이 내키면. 혹시 내가 개헤엄만 쳤다면 폼이 안났을 테니까, 제대로 수영을 배워볼까, 아님 말고. 그러므로 물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 줄이기 위해 오랫동안 만들어왔던 이런저런 핑계가 없어진다. 그로부터 풀려난 에너지를 다른 데 쓸 수 있다. 물과 관련된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곳곳에 만들고 둘러쳤던 수많은 우회로와 가림막들을 부수고 가까운 길로, 숨지 않고 나풀나풀 걸을 수 있는 거다. 랄랄라~ 알게모르게 주체를 삼키던 공포와 불안을 인지하고 달아나기 위해 촘촘했던 감각적 밀도를 낮추니 경직된 몸이 풀리고 웃음도 잦다. 전반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두려움은 내 안에 있다고 말하는가 보다. 바깥에 있는 대상은 그저 있을 뿐. 누군가는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물은 그냥 물이니까. 누군가는 물만 보면 신이 나고 풍덩 들어가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런 물이 나에게는 갖은 두려움과 걱정의 대상이었던 것. 어쨌든 빠져서 한바탕 잘 놀았다. 생이라는 물! 이제 더 잘 놀고 있다.(어, 나 유령인 거야?)


아픔과 고통을 직면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 진실을 알고 그것을 뚫으며 변화를 만드는 것은 참 괜찮은 삶의 과정이 아닌가.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인 거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에게 주어진 흔치 않은 진정한 선택의 기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선택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거나 강제된 선택이 아닌 진짜 선택.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이 살아보지 않고 포기하려는 자에게 진리를 가장한 핑계로 사용되지 않으면 좋겠다. 나름 살아본 뒤 변화를 향한 능동적 체념, 지금에서 다음 자리로 발을 옮겨 딛기 위한 적극적 체념의 말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자, 이제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가 남았다. 나의 시작 또는 물과의 원초적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꺼낼 수 없었던, 아득히 뒤로 밀려있던 이야기를 가져오자.


3

마흔 살에 일곱째인 나를 가진 엄마. 하던 일의 실패와 음주 사이를 반복하던 아버지가 화병(火病)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엄마... 그 고민의 무게는 어마어마했으리. 생명 하나를 열 달 동안 품고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에 대해 제 꼬리를 물고 휘돌다가 삼켜지지만 어딘가에 걸려있는 무한반복의 질문들... 엄마 자신 말고 누가 뭘 어찌 알 수 있을까. 낳아서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 어떻게 얼마만큼 책임질 수 있을지. 아픈 남편까지 돌보며...

쓸 수 없는 글을, 씌어질 수 없는 문자를 나는 쓰고 있다. 그러나 발화되어야만 날아갈 수 있는 문자.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써야만 하는, 기록으로 잡아앉혀야만 마침내 쉴 수 있는 말들.


엄마는 나를 ‘떼기’로 결심했단다. ‘뗀다’에 들러붙은 모든 의미와 감정이 제거되어 전달된 말이었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은 말이었다. 나는 이미 태어나 잘 놀고 있는데 뭘. 새끼오빠 따라 다니며 노느라 바쁘지, 만화 봐야지, 베끼거나 그려야지, 너무 재밌는데 뭐가 문제야. 커가면서 오히려 남과 다른 내 탄생에 약간 신비함과 특별함을 지니게 되었는걸.


4

세 달 뉴욕 여행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했던 2010년 12월 30일. 사흘 동안 계속된 폭설로 나는 맨하탄 어퍼웨스트에서 JFK공항까지 한나절만에 겨우 갈 수 있었다. 기다리는 승객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대합실 상가에 식품은 떨어졌는데 여전히 비행기는 뜨지 못했다. 주변에 있는 눈 녹은 물이나 휴지조각따위도 개의치 않고 아무 데나 앉고 누운 사람들이 참 편안해 보였다. 나 역시 그럴 수 있었던 때를 생각했다. 동시에 그럴 수 없게 되었던 건 언제쯤부터였는지도 막연히 더듬으면서 불안 위에 뒤틀리는 몸과 마음을 수시로 직면하며 견디고 있었다.


20여 시간 뒤, 마침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어지럼증에 더하여 지치고 녹초가 된 나, 타고난 에너지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자리에 앉다가 왼발목이 아파서 봤더니 복숭아뼈에 물이 고여 정말 작은 복숭아만큼 커져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부풀게 된 걸까. 갖은 상념이 오가는 중 불현듯 엄마 태중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죽음의 공포를 뒤집어 쓴 작은 생명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가 겁이 많은 것과 물을 무서워하게 된 기원이 이것이란 생각이 어떤 이질성과 함께 확 밀려왔다. 엄마가 평생 지녔던 무게 가운데 가장 버거웠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에 대해, 곧 나의 시작에 관하여 생각했다. 탈구된 시간을 순식간에 이으며 모아들이는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엄마 뱃속의 나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내 이름이 곧 태아의 이름이라는 것이 좀 낯설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멀리 있는 존재려니와 분명 내가 획득한 이름은 탄생 이후이므로 53년 전 태아-나를 부르기엔 기이한 거리감이 있었다. 너를 뭐라고 부를까... 원더! 맨하탄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이름을 묻기에 wander라고 했더니 wonder라고 컵에 써준 걸 보고 결정한 내 별명이다. 방황하며 돌아다니든, 경이로움이든 비슷한 소리에 뜻은 포괄적이니 얼씨구. 너는 wonder, 나는 wander로 할까? 그래 원더.


5

엄마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 원더에게

오호, 사랑스러워라. 탄탄하고 맑은 모습에 움직임도 힘차네. 건강하게 태어나 당당한 한몫의 어른이 될 게 분명한걸. 원더야, 나는 53년 뒤의 너야. 그러니까 네가 엄마에게서 태어나고 자라서 지금 내가 된 거지. 물론 나도 원더야.

원더야, 어때, 따뜻하고 편안하니? 엄마는 이미 여섯의 언니오빠들을 키워냈으니 네게 무엇이 좋은지 잘 아시지. 그러니 네게 좋은 모든 것을 다 해주실 거야. 엄마는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물어볼게 있어, 원더야. 너 세 달 무렵에 엄마가 너를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게 정말이니? 엄마가 간장을 들이마셨다는, 정말 그랬어? 네가 강한 불편감 속에 위축되고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엄마가 정말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서 네가 엄마로부터 떠나가기를 바랬다면 말이야. 네가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지... 도와달라고 외쳤어? 엄마, 나 이상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나 아파요. 원더야, 너 울었니? 그렇지만 아주, 아주 잠깐이었지? 엄마의 생각과 행동이 네게 전해져 불안하고 무서웠던 건 잠시였기를. 그런 걸 느꼈니? 슬픔과 놀람과 배신감, 버려진 느낌 같은 것 말이야.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상상일 뿐일까.


잠깐이었어도 아프고 무서웠겠지. 아득히 전해오는 두려움 가운데 혹시 네가 사라져 버릴까봐 온 세포를 오그리며 떨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내가 녹아내리고 말 것만 같아... 꺼져버리는 한 점 반짝임. 그때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니. 평화롭던 엄마 안, 따뜻한 양수가 위험과 공포의 장소로 변했다면 말이야. 그래서 내가 물을 무서워하게 된 거란 생각이 들거든. 한편 그래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힘을 갖게 된 것도 같고. 또한 생명을 자기 몸에 지니고 키워내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 여성들의 권리와 자립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많은 게 당연하지.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태아 원더에 대한 상상력 덕분일 거야. 뱃속의 딸에게 일찍부터 내 하루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든. 미리 지어놓은 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 주었더랬어. 내 감정과 기분도 알려주며 노래를 불렀지. 동요는 물론 우리 민요, 판소리부터 클래식, 유행가,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려주었단다, 뒤뚱뒤뚱 춤도 추면서 말이야.


태아 원더야. 네 활발한 움직임을 내가 느끼는 걸 보면 넌 지금 6개월쯤 된 것 같아.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을 잊고 씩씩하게 자란 거지? 엄마는 널 원했던 거야.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너 떼려고 간장도 마시고 뛰어 내리기도 했다.’거나 ‘낳아서 부잣집 대문 앞에 갖다 놓으려고 했지’라는 말을 가볍게 했을 리가 없잖아. 열 살쯤 되었던가 싶은 어린 원더, 나한테 말이야. 소중히 여기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던 거지. 엄마가 그랬거든. ‘낳고 보니 얼마나 예쁜지, 남 줄 생각이 나나?’ 그건 태아 원더 너이자 나에게 미안함과 사랑을 가득 담은 말이었거든.


그렇고말고,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니. 엄마가 그 일을 솔직하게 말한 건 정말 잘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 그지? 아이에게는 곧장 오는 말이 필요할 때가 많으니까. 어쩌면 내가 잊어버렸는지도 몰라. 아마 네게도 느낌으로 깊이 전해졌을 거야. 그러니 원더야, 엄마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네게 싸늘하거나 답답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했겠지만 곧 다시 따스해지고 편안한 엄마의 궁궐 안에서 잘 자고 놀았지? 엄마, 너무 짜요, 간장 마시지 말아요. 흔들려서 잠을 못자겠어요, 뛰지 좀 마요~하면서 이겨낸 거지? 그래서 내가 장난을 잘 치는 것 아닐까? 태어나서 소중한 존재가 될 준비를 한 거 같아. 고마워. 지금 내가 어른 원더로서 나의 삶을 시작부터 돌아볼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엄마는 결국 널 건강하게 낳았지, 진심어린 환대였어. 내내 나의 수호천사가 되어주었거든. 정말로 그때 엄마는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그랬다면 내가 똘똘한 아이로 명랑한 소녀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교사로 잘 살 수가 없었을 테니까. 엄마의 그런 벅찬 고민 끝에 태어났기 때문에 난 일찍이 고민하는 법을 알았는지도 몰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이왕이면 좀 더 잘 해보려는 식으로 말이지. 그런가 하면 다른 집 딸들처럼 내가 엄마랑 하하호호 친밀하지 못했던 게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르겠어. 친밀함이 일으키는 문제 역시 많지만 말이야.


원더야, 있잖아, 나는 엄마가 말이야, ‘너를 뗄 생각을 했다’는 말을 나한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랬더라면 몰랐을 거고 순간적이나마 서운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다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숨긴 비밀은 마침내 드러나고 말거든. 찾으려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할 뿐이거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몰래 전해져서 해석할 수 없는 다른 고통들을 만들어 낸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엄마가 말을 안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성격이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지 않겠니? 나 자신과 화해하고 인정·수용하기가 더 어려웠을 거야. 원더야, 이렇게 너랑 대화하면서 나와 우리의 시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지 않니?


뭐? 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태아 원더가 태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쉰셋 원더도 없다면 어떻겠느냐고? 글쎄... 그걸로 끝이지. 굳이 말하자면... 이렇게 네게 편지 쓸 일이 없겠지. 문서에도 내 이름이 없겠지. 없다,는 말조차 불필요하지. 그러니까 현존하는 엄마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랬다면... 엄마는 자신의 삶에 좀더 자기의 의지로 집중할 수 있었을 거야. 고민 끝에 내린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감당하고 책임졌을 테니 이후의 삶이 조금 더 힘차고 덜 무거웠을 게 틀림없어.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우리 엄마라는 한 여성의 미래, 삶의 질과 지속성이라고 생각해.


원더야, 난 지금 하늘을 날아다니는 네가 보여. 내가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기 때문인가 봐. 평화와 생명의 양수, 물의 바다 하늘을 헤엄치는 아이. 그 아이는 중섭의 그림에서처럼 복숭아를 안고 있구나. 타고 논다는 게 더 알맞겠다. 앗, 복숭아가 달로 변하고 있네. 하하하 참 좋구나. 고마워 원더! 온기가 밀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지고 힘이 난다.

이제 한국, 내 땅에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졌어, 원더야. 시간을 오르내리며 나를 찾는 공부를 할 거야. 이제 내 안의 수많은 어린 원더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서서히 하나씩 손잡아 일으키며 보듬어 줄테야. 놀아주고 대화할 거야. 그러다 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 넓고 깊어질 수 있겠지. 엄마와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될 거야. 세상의 엄마들과 아버지들에 대해서도. 밉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말이야. 나의 말을 찾아 지니고 싶어. 내 목소리를 길어올릴 테야. 아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에고, 갑자기 등이 가렵네, 날개가 돋으려나 봐.

원더야! 너의 모든 걸 사랑한다, wonder이자 wander! 고마워~.


이전 10화드라마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