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넷, 금강에 빠지다

의미의 뼈만 남았을 때

by 박경이

1

그건 종휘다, 종휘 때문이었다. 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달이 너무 환하고 크고 아름다웠으니까 말이다. 맞다, 손바닥으로 한 부분 아주 살짝 가볍게 밀어놓은 듯 완전히 둥글기 전의 달이었다고 기억된다. 은은히 부드럽게 흐르며 빛났고 강물에 반사된 빛줄기들이 춤추자 작은 나룻배에 타고 있던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종휘는 소주병을 들고 있었고 그 병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대학 졸업 직후, 새내기교사로 부임했던 학교에서 애들과 정 들자마자 입대했던 동기들 가운데 두 친구가 겨울방학 비슷한 때에 휴가를 나왔고 우린 함께 서천의 선배네로 놀러온 참이었다.


“아! 달이여 하늘이여....”

종휘가 무슨 시 구절을 외치듯 읊조리며 벌떡 일어나서 술병과 함께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순간 작은 배는 흔들렸고 종휘도 비틀, 휘청. 앉아 있던 세 사람의 웃음소리와 말리는 소리가 한겨울 쨍쨍한 허공을 가르며 배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우리 네 사람은 그대로 강물에 빠졌다. 1월의 강물은 순식간에 두터운 겨울 외투 안으로 스며들어 무거워지는 몸의 체온을 끌어내렸다. 따끔따끔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쩡쩡 울렸다. 온 몸과 뇌가 쩌릿쩌릿 욱신거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얼음물에 빠지면서 머릿속을 관통한 말이다.


종휘와 민호(내 남편)는 뜰 줄 아는 정도였고 나는 전혀 헤엄을 칠 줄 몰랐다. 허부적거리며서 선배가 이끄는 대로 어찌어찌 서로를 의지하며 움직였던가, 아뜩아뜩하던 중에 강바닥에서 불쑥 솟은 부분을 찾았다. 그걸 붙들고 발아래 디딜 곳을 찾아 위쪽으로 조금씩 더듬어 몸을 올려 세우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치켜들고 마침내 숨을 쉴 수 있었다. 위급상황을 모면하자마자 선배는 사람들을 부르러 헤엄쳐 나갔다.


얼마나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생각도 몸도 마비되어간다. 발끝부터 얼어붙으니 딛고 있을 수가 없다. 얼굴을 내 놓은 채 숨을 쉴 수는 있었으나 목을 있는대로 빼지 않으면 키가 작은 나는 코가 들락날락, 조금이라도 높은 부분을 찾아 거듭 미끄러지면서 더듬어 발끝을 치켜세워야 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내가 죽을 줄 알았다는 듯한 느낌. 어떻게 죽을 것인지 궁금했는데 지금 답을 찾았다는 것 같은. 발악이 아니라 차분. 속수무책의 체념. 이렇게 죽는 거구나, 그리 무서운 것도 아니구나...


통증으로 찔리며 얼어가는 몸을 비집고 노래가 나왔다. “기도하는 사랑의 눈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한창 사랑받던 조용필의 ‘비련’이었다. 완성되지 못한 음절마다 끊어지며 이빨과 함께 툭, 툭, 떨어져 내리는 우스꽝스러움. 의식인지 기억인지 껌뻑, 껌뻑, 하는 사이, 사람들 소리가 들렸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불빛이 아른아른...우리 이름들을 부르는 선배 목소리... 괜찮아? 살았어? 조금만 참아?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하나씩 배위로 끌어올려졌다. 몇 사람이 왔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물과 하나가 되어 가던 상태에서 물과 분리되면서 밀려오던 안도감이 참말로 뜨거웠던. 나로부터 분리되던 것은 물이 아니라 강이었다. 버석거리던 그것은 액체가 아니라 고체였고 물질이 아니라 추상이었다. 물이자 얼음에 가까운 강의 무게감이나 부피감이 강렬하게 몸에 남아 있는 듯, 느껴지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어떻게 ‘운반’되었는지도 모른다. 선배네서 여동생의 옷을 얻어 입고 아랫목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부뚜막에서 어른들이 잘 말려주신 내 옷을 입었을 때는 그대로 걸어 하늘로 오를 듯 했다. 선녀의 날개옷이 이런 거구나! 깊은 가을하늘색 바지와 좀더 진한 터키블루 반코트. 그 물빛 옷을 도로 입고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었으니 선배 가족과 이웃분들께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2

이것도 컴컴하게 오래 묻혀 있다가 올라왔다. 10여 년 전, 정신분석 공부를 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나와 관련된 외상적 사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던 때다. 진짜배기가 떠오를 듯하면 덮어누르기를 몇 번, 그때마다 강물 위에 훤하던 달과 종휘의 시구절이 아름다웠을 뿐. 기억의 왜곡, 견디기 위해서 무의식은 기억을 변형시키고 위장한다는 걸 나를 통해 통렬히 깨달았다.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이라서 그나마 저항이 덜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몇 달 전 상가에서 뜻밖에 종휘를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도 하려니와 수십 년 만에 만나 나눌 의미있는 추억거리 아닌가.

“나? 내가? 전혀 그런 기억 없는데?” 이럴 수가!

“뭐? 분명히 너야.”

“아니야, 나 그런 일 없어. 그거 나 아닌데?”

“휴가 나왔을 때 우리 셋이 서천 선배네 갔잖아.”

“아니야, 안 갔어. 나 아니야.”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보다. 그럼 누구였을까...


종휘가 가고 마침 선배가 왔다. 더욱 반겨 물었더니 종휘 맞단다.

“그런데 아니래요, 아까 만나서 물었더니 그런 일 없대. 선배네 가지도 않았대.”

“그래? 그럼 다른 친군가? 재철이? 종휘 아니면 재철인데.”

“재철이 아니야. 종휘 맞아요.”

“그려, 맞아. 아마 잊어버린 걸 거야. 자기 때문에 물에 빠졌으니 얼마나 미안했겠어. 괴로우니까 잊은 거지.”

나는 적극 동조했다. 고통스런 사건에 대한 무의식적 억압과 부인에 대해 말했다. 다른 기억으로 바꾸고 대체한다고. 원인제공자로서 그는 더 힘들었을 테니 아예 사건자체를 잊게 된 거라고. 이제 선배가 적극 동의했다. 한편 나는 종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강하고 완전한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선배가 나를 부른다.

“내가 민호한테 물어봤는데 종휘가 맞대.” 맞고말고!

“그런데 물에 빠진 건 나 때문이라는데?” 이건 또 뭔가.

종휘가 소주병을 들고 벌떡 일어났을 때 선배가 위험하니까 앉으라고 했단다. 계속 서 있자, 너 안 앉을껴? 앉아 얼른. 하다가, 어디 한 번 혼나 볼래? 하며 배를 조금 흔들었다는 거다! 오호,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참, 그러니까 나도 배를 흔든 게 미안해서 잊은 거겠지. 상상도 못했어. 정말 재밌네. 그런데 왜 옆에 있는 남편한테는 아직 안 물어본 거야?”

“물어 볼 참이었어요. 혹시 내 일기장에 써 놓은 게 있나, 그게 제일 정확할 테니 천천히 찾아본 다음에 물어볼까 하고 있었죠.”


재미있다. 관계의 점들을 하나씩,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을 만나고 나와 더욱 가까워지는 동시에 다른 이들을 여러 측면으로 거듭 이해하는 일이 참 좋다. 이제, 이것은 사건도 아니고 추억이 되었다. 기표 하나로 응축되어 날아갔다. 심연으로부터 평화를 길어올리고 있는 내가 기특하다, 후후. 종휘에게는 마쳐야 할 숙제일 수도 있다. 본인이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숙제란 잊어버리기 마련이니까 뭐, 미뤘다가 하는 게 숙제니까. 어쩌면 이제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벌써 하고 있는지도. 숙제하고 싶어서 상가에서 우릴 만난 게 틀림없다.


3

이런저런 중대한 일과 맞닥뜨릴 때 성인들은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항변하며 지나갈 힘이 있다. 세상에 던져진 말들을 가져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둘러 붙이며 살아갈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나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이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충격이 크고 오래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까닭은 사건 당시 날뛰는 정동들이 달라붙을 기표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유아기의 사건이 깊은 트라우마로 작용하기 쉬운 이유는 그것을 해석할 말을 유아가 전혀 지니지 못했으려니와 어른이 설명해 줄 방법을 찾기도 어려워서다.

정의상 트라우마는 치유불가의 외상을 말한다. 말로 해석되지 못한 사건은 잘 잊힐 수 없다. 언어라는 상징으로 죽임 당하지 못한 고통과 상처는 깊이 새겨져 무언의 목소리로 각인된다. 그것은 지켜보고 명령한다. 저항불가의 무한 복종으로 자신을 배반함으로써 천성처럼 되고 ‘이상한' 성격이라는 딱지가 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고통에 젖어서 익숙할수록 고통은 더 친밀하며 오히려 달콤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들이닥쳐 그나마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까스로 세워 놓은 자아,라는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하여 생生을 삼키기도 한다.


언어로 의미화 할 때만이 억눌렸던 힘을 동력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상징화를 통해 의미의 뼈만 남았을 때 피 흘리기를 멈추면서 상처는 진실로 아물기 시작한다. 그것에 압도당한 채 살기를 거부하고 떨어낼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견디는 동물이 아니라 사는 인간일 수 있다. 진심으로 좋아서 뭔가를 하고 싶어진다. 얼어붙은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살아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살 수 있다. 완전히 봉합할 수 없는 미세한 틈으로도 맘껏 숨 쉬며 주체는 자신만의 것을 창조한다. 한바탕 살아볼 힘을 가지게 된다. 고통에는 보상이 따르며 고통은 주로 보상을 데리고 온다. 그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원했던 건지 아닌지는 자신만이 안다. 선택할 새도 없이 고통에 의해 집어삼켜지는,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이자 강제된 선택의 결과일지라도!


아이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네 잘못이며 네 탓이지만 그것을 깨닫는 때가 오기까지는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나 삶에서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사는 일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그것들은 서로 붙어 있어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거든, 햇빛과 그늘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네게 와서 네가 살았던 것들, 너를 만들고 또 네가 만들었던 모든 것이 네 삶, 네 것임을 알게 된다는 뜻인 거야. 그 모든 것들이 네 생이며 곧 너임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된다는 말이지. 잘 익은 과일향기 나는 사람,이라면 어때? 어른이 안 되어도 괜찮아. 잘 익을 필요도 없어, 과일은 무슨! 그렇지만 모든 것이 너를 만든 너의 것이고 너야, 오직 너만의 것이지. 창문을 열고 집어던질 수도 없는 것들. 끝내 끌어안고 함께 춤출 수밖에 없는 것들. 두려움을 지닌 채로 맘껏, Shall we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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