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고무장갑을 꿈꾸다

변소에 빠지다

by 박경이

1

70년대 초, 아파트가 우리나라에 지어지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닭장이라며 웃었다. 변소가 집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게 말이 되느냐고들 했다. 자기 머리위에 누군가 줄줄이 앉아 똥을 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침을 튀기는 아저씨들이 참 많았다. 집 안에 변소가 있으면 어린이들이 밤에 무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면서도 나 역시 찜찜했다. 울타리 안에만, 방문 바로 앞에만 변소가 있어도 무섭지 않아 좋은데 그걸 집 안에까지 불러들일 필요가 있는가 싶었다. 아무리 ‘수세식’이라고 해도, 그게 뭔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한편 사람들이 층층이 변소에 앉아 똥누는 광경을 그려보기도 했다. 재미나게 오래 하고 싶은 상상은 아니었으나 신기함과 호기심으로 새로움과 편리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여하튼 아홉 살 내가 살았던 60년대 한국 도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집이 하나의 화장실, 당시에 변소라 불렀던 그것을 함께 사용해야 했으니 아침이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풍경이 흔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식구들만 사용하는 변소가 울타리 안에 있는 집들은 주로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 철대문을 단 꽤 번듯한 집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했던 이층양옥집도 변소는 보통 대문 옆의 마당에 두었으며 집안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게 몇 집이 하나의 변소를 사용했던 때에 우리 식구는 좌우로 그것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후후, 귀한 변소를 말이다. 왼편으로 바로 옆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은순네와 함께 두 집이 주로 사용하는 게 가까웠고 그보다 좀 멀리 오른편에 있는 것도 사용할 수 있었다.


2

그렇다, 2학년 여름방학 끝 무렵, 비 오고 으슬으슬 춥던 날이었다. 홑이불 속에서 뒹굴다가 다른 때보다도 더 늦게 일어났을 터이다. 아침부터 비가 살살 오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변소를 택했을 터인데 왜 멀리 있는 곳으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사용하고 있어서도 아닌 것만 같다. 여하튼, 비에 푹 젖은 나무 문짝은 당기기가 아주 힘겨웠다. 그리고 바닥도 입구부터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엉성한 지붕에서 떨어진 빗방울로 온통 젖어 있어 비가 밤새 왔음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미끌ㅡ 생각할 사이도 없이 변소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다리가 빠지고 말았다. 눈을 번쩍 떴을 때, 완전히 빠지지는 않고 살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내 양 손이 바닥 판자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 얼굴 바로 앞에는 침을 비롯하여 표기하기조차 괴롭도록 더러운 것들이 떡 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트라우마적 사건의 기억은 자못 평화로이 아무렇지도 않게 끊기며 펼쳐지는가 하면 결말이 없다. 그 절정의 시작과 동시에 무섭게 끝난다, 문을 닫아버린다. 마법적 전환으로 바꿔치기 된 결과물만 놓고 꼬리를 감춘다. 감정을 절단해버리기 때문에 느낌이 없으니 고통도 모른다. 먼 남의 일 같다. 생명의 힘, 존재하기 위한 고도의 방어술이자 책략이다.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하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갖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장기지불 형식이기 때문에 공짜인 줄 안다. 심지어 단순하고 재밌는 일화로 소비된다. 나는 그 지불내용이 궁금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무이자 같지만 엄청난 이자까지 냈을 수도 있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게다가 그 건수가 많다 보니 곳곳에 할부금 내고 나는 뭘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 다리는 오물통에 빠져 있었다.(키가 작아 다행 아닐까-_-) 소리를 지르고 지르고 또 질렀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가 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빠지면 죽는다거나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공포감 못지않게 당장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인간의 코와 입에서 나온 배설물들이 더할나위 없이 무섭고 견딜 수 없었다. 손과 팔에 힘은 빠지고... 그리고는 난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거기에서 멈춘다.


3

이상하게도 이 사건과 관련한 기억은 언제나 따뜻한 아랫목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미지의 회색공간을 떠돌다 다시 아랫목으로 되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한 다음에 처음을 불러낸다.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덮고도 덜덜 한기를 느끼면서 잠들다 깨기를 되풀이하던. 깊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듯 잠에서 깨어날 때 내 옆에 엄마가 있으면 너무 좋았다. 어쩌다 아무도 없으면 참 서러웠다. 언니오빠들은 나한테서 냄새난다고 다른 방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미닫이를 밀고 나를 놀려먹었던 게 더 좋았다. 물론 두 밤쯤 뒤에 언니오빠들은 내가 누운 방으로 나를 위로하러 슬슬 드나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만화나 과자를 가지고. 그러니 그 모든 것들은 나쁘지 않았다. 엄마가 그때 했던 말 가운데 나를 설명하는 것 하나가 언제나 떠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심하게 붉고 몇 군데 부풀어 오르더마 다행히 금방 괜찮더라. 살성이 좋아서 그렇다 아이가.”


마침 근처를 지나던 동네 아저씨가 나를 구했다고, 천만다행이란 말을 들었다. 아저씨도 버거워서 엄청나게 소리를 질렀다는데 엄마도 그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왔다고 했다. 어떻게 끌어올려져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나를 집으로 '끌고가는' 동안 비가 많이 와서 좀 씻겨나갔기를 바랄 뿐. 고무장갑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건 그때 발명되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왔다. 부엌 입구에 있었던 펌프에서 엄마가 나를 씻길 때 너무 추워서 한없이 떨었던 건 종종 감각적으로도 선명하다. 여기저기 된장을 발랐던 일도 드문드문 떠올랐더랬다. 씻기고 씻겨도 냄새가 가시질 않았으며 똥독 오를까, 여기저기 덧날까봐 며칠을 걱정했다던 엄마. 나를 들여다보던 엄마의 걱정스런 얼굴이 어슴푸레 갸늘갸늘 떠오르다 사라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엄마한테 야단맞은 기억이 없다. 엄청 혼날 일들이 많았는데도 야단맞고 울거나 서러웠던, 그리고 엄마를 원망했던 기억은 없다. 어쩌면 이렇게 속을 썩이느냐고 소리라도 된통 질렀을 법한데. 이상한 일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정말 내게서 떨구어내고 싶은 것들... 알 수 없는 고통이자 상처는 자기의 일부를 죽이거나 가두기도 하지만 은연중 자신에게만 사용가능한 자양분이나 거름으로 만들고 변화시키기도 하는 법이다. 숨기고 가리면서, 더하거나 억누르면서 기억은 옅어져 갔으나 수십 년 내게 남은 것은 비오는 여름날 아랫목의 온기이며 전적인 엄마의 관심이다. 그리고 내가 오래오래 지니게 된 말은 ‘나는 살성이 좋다’는 것이다. 모기에 물려도 침 한 번 바르면 잠시 간질간질 붉어지다 괜찮았고 넘어져 무릎이 까여도, 종기가 나도 덧나지 않고 잘 아물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무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어도 살성이 좋아 반창고만 잘 붙이면 된다고 완벽하게 믿으며 살았다. 훗날 시골집 꽃밭에서 벌에 쏘였을 때도 몹시 무서웠으나 소주에 씻고 된장을 바르며 괜찮을 수 있었다. 나는 살성이 좋으니까.


“이제 경이 키 크겠네.”

“변소에 빠졌으니 거름 돼서 잘 클 거야.”

“거름도 너무 많이 하면 안 좋은데.”

“키는 안 커도 속은 여물겠지.”

작다 하지 못할 사건을 별 탈 없이 잘 넘긴 나를 보고 동네 어른들과 오빠들의 놀림 같은 말에는 걱정과 깊은 안도감이 담겨있었다.

끝의 것은 엄마가 한 말이다.

키는 안 커도 속은 여물 것이다.

여물지 못했다면 필요한 만큼 여물기를.

이전 06화네 살, 용기를 길어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