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편지를 썼으나

형식이 중요하다

by 박경이

1

어릴 적 엄마가 하늘님께 비는 모습을 봤더라면 나도 기도하기가 쉬웠을까. 어떤 바람이 간절할 때도 마음이 말이 되긴 어려웠고 몇 마디 할까 하면 절로 꼬리를 감추는 말. 나 역시 신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견뎠겠구나 싶었다. 누군가의 엄마들과 어떤 아버지들도 그랬을 거다. 도움이 주어지기를, 잘 되어 나아지고 살만하기를 마음으로, 소리 없는 목소리로 간절히들 빌었을 것이다. 행복,까지는 언감생심.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그들에게 없었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든지 바람의 말들은 그 속에 언제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바다에 떠있는 나뭇잎 하나,는 우주의 위로와 도움을 바랐을 터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위대한 존재는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오직 자신의 일들을 하고 또 했을 터이다. 내 할 일을 내가 하면 하늘님이 굽어 살피실 거라고, 천지신명이 아실 거라고... 너무나, 너무나 ‘신앙’적인!


말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자기 이미지를 따라 빙빙 도는 상상적 독해는 고통의 과도함에서 비롯되는 무력감일 뿐, 말해야 전해진다. 그것은 신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먼저 전해지지 않으면 어디에도 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은 편지는 씌어 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신에게 도착할 리 만무하다. 자신의 바람을 분명하게 발화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편지가 쓰이지 않았다면 무엇을 부친다는 걸까? 편지가 없는데? 자기에게 써야 자신의 이름으로 부칠 수가 있다. 쓰고 말해야 한다. 편지,라거나 기도,라는 이름의 형식이 있는 이유일 거다. 그러니 엄마도 우리 뒤란 작은 우물가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의 말을 했더라면 편지쓰기가 쉽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는지 따박따박 내 입술로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뭘 알겠는가. 말을 통하지 않고는 나의 바람이 분명해지기 어렵다.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야 내 것과 남의 것이 구분된다. 더듬더듬 단어를 찾고 감정을 느끼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가 편지쓰기다. 과장과 거짓이 발견되고 수치심 아래 숨은 자부심도 발견된다. 막연한 상상으로 고정되어 있는 생각을 흔들어야 정말 내게 필요한 말이 떠오른다. 가라앉을 것은 앉고 뜰 것은 뜨며 무게와 밀도에 따라 층이 보인다. 원했던 것이 사라지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다가오며 드러난다. 엄청나 보이던 것이 작아지고 감당할 것과 못할 것이 구별된다. 말하고 쓰는 중에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보인다. 문이 열린다. 두루뭉술한 것은 나뉘며 끼리끼리 모둠이 된다. 가르고 나누어야 뭉치고 엮을 수 있다. 사적이자 공개적 발화인 동시에 하나의 폼이고 형식이 된다. 이행된다. 전하려는 대상이 있는, 두 세계의 소통이다. 대상의 이름을 부르며 분명히 말할 때 상상적 독해는 상상하는 힘이 된다. 실행.


2

그렇게 씌어진 편지는 전달 임무를 다한 것과 다름없다. 결과야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알려주지 않는 로또 번호를 신이 아실 리 없고 알려줘도 당첨 가능성은 모른다. 삶은 공식도 프로그램도 아니니까 말이다. 신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거짓말이 떠오르기도 하고 자기 이름을 빼먹었는지 혹은 수취인을 잘못 썼는지 의심도 할 터이다. 전달되지 않은 편지를 다시 쓰면서 주체는 자신을 반영한다. 그런 사색과 성찰의 과정에서 무수한 크고 작은 변화와 관계의 파동을 겪으며 제 삶을 살아간다. 이미 문제는 해결 중. 신을 부르지만 자신을 부른다. 그래서 편지는 자신에게 쓰는 거고 기도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지만 신을 경유함으로써 완결성과 확신감을 더한다. 형식이다. 이제 우리는 신을 탓할 수 있다. 제 탓임을 알면서도 남 탓도 할 수 있을 때 생은 가벼워진다. 편지는 씌어졌고 분명히 전달되었다.


해결이란 없다. 해결이 끝도 아니다, 이어지는 삶,이 있다. 끊임없이 자신과 드잡이하고 대화하는 한편 스스로를 가르치며 간다. 남들도 어슷비슷 달리 함께 간다. 모든 남들은 더할 나위 없는 참고자료다. 밖을 향함 없이 안으로 돌아올 수 없으며 타자를 경유하지 않고 나를 발견할 길은 없다. 신이야말로 좋은 자료일 수 있었음을, 멋진 길동무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로소. 나는 그랬다. 내가 내 이름을 부르기가 너무나 외로울 때 내 이름 자리에 가만히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다른 이름. 맘껏 살아볼 힘을 내며 쉴 수 있는 그 장소의 이름, 그 가능성의 이름이 신인 것을. 신의 자리에 누군가는 돈을 놓았을지라도 신의 자리다. 공짜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조금 착하게 말하자면, 신의 자리 옆에 내가 앉는데 평생이 걸렸다. 공짜라서 값없어 보였던가. 그렇게라도 튀고 싶었던가. 후후후. 나는 왜 그 이름을 부르기가 그리도 어려웠으며 남이 부르는데도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를 줄 아는 것만도 힘이었던 것을 몰랐다. 그 자리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내 옆인 것을. 거기까지도 멀었던가, 그렇게나 힘들었던가. 어쨌거나 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음 알 수 없었다.


3

편지를, 특히 여자들이 많은 편지를 쓰지만 도착하지 않는 까닭은, 이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생각으로 썼기 때문이다. 결국 무수한 편지를 썼으나 한 통도 쓰지 않은 것과 같다. 게다가 신 다음으로 ‘알 거라고’ 가정되는 대상은 대개 아버지, 남편이며 주로 남성,이었다. 대형복권에 당첨되는 운이 따르지 않는 한, 가장 믿음직하지 않은 대상 아닌가. 수천 년 굳건한 환상이자 이데올로기적 믿음 속에 여자들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존재들. 이들은 한편 이들의 사회가 일찍이 길들여놓은 탓에 ‘뭔가 가졌다고 가정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진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도 잘 몰랐으니, 모르면서 아는 체 가진 체 흉내를 내야 했던 건 엄청난 문제였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있는 체 하거나 점잖게 모르는 척 했으니 말이다. 흉내를 내다가 더러 진짜가 되기도 하는가 하면 흉내조차 못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래저래 폼을 잡느라 자신이 힘들다는 걸 몰랐고 폼을 무너뜨릴 수 있음도 몰랐다. 알려고 하지 않았던 까닭은 일단 남자로 먹고 들어갔기 때문에 얻는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자로 폼 잡느라고 정작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더러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남자,라는 기표 뿐임에 대해서도. 더욱이나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그것조차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헛된 표딱지를 달고 시늉하는 삶의 피곤감과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먼저 깨닫고 실천하고 외친 많은 여자들과 남자들 덕분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의 말하기 힘든 고통과 희생 덕택이다. 어렵고 힘든 변화가 조금씩 보인다, 아프고 기쁘다. 내게 도착한 수많은 편지들을 읽으며 변화하는 삶을 지켜보는 나는 두근두근. 재미있다.


4

수취인이 없는 편지가 마침내 도착하는 장소는 자신이다. 우주를 떠돌아 평생을 헤맨 끝에 자신에게 도착하기도 한다. 언제나 발송인과 수취인이 같다. 누구에게 썼든지 간에 모든 편지는 자신에게 쓴 편지다. 새롭고 정확하게 자신의 말을 불러내어 쓸수록 수취가 빠르다. 쉬운 말은 쓰기는 편하나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새로운 생각으로 이끌지 못하니 무의미에 가깝다, 쓰나마나다. ‘평이한 글에는 속임수가 있다’는 스피박의 말처럼 자신에게 속고 대타자에 속는다. 불편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일으키는 말들을 가져야 천천히 이면을 읽으며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 말에 걸려 자빠질 때마다 쉬어가며 자란다. 자신을 아프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말일수록 자신과의 화해에 필요한 말이며 자신을 해석하는 실마리인 경우가 많다. 몸에 들어가는 값진 말들이 자기 생의 아우성에 공감하고 화답하며 이해에 이르고 사랑하게 돕는다. 그렇게 조금씩 숨쉬고 살기가 수월해질 때 병리적 자신을 인지하는 힘을 일으킬 수 있다. 마치 훈장처럼 달고 살던 고통을 뜯어내고 웃음으로 발효시키는 삶은 곧 시간을 만드는 삶이다. 시간은 내가 만든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말하지 않아도 정말로 알 수 있는지. 머금고 있는 말도 전해지는 건지. 상상적 독해만으로도 충분한지. 스스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생시키는 이미지의 증폭 가운데 진실로 충분할 수도 있는지. 그러다가 가차 없는 병의 이름을 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삶, 병리적 나와 화해하며 다르게 살아보기... 종종 누군가는 묵직한 병명을 획득함으로써 최종 평화를 얻기도 한다. 전적인 내맡김! 자신에 대한 배반일지라도. 내가 뭘 알겠는가, 그게 또 구원의 한 방법일지.



그가 지적하는 것은 쉽게 읽히는 글의 기만성이다. 쉽게 읽히는 글은 이미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문법과 사상 그리고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잊고 글을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러한 쉬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된 낡은 집단 안에 깊이 묶여버려,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김은주『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봄알람. 64ㅉ. 2017.)

이전 04화여덟살, 햇빛의 신맛을 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