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뼈가 부러지다
1
키 이야기가 나올 때면 사람들은 왜 키가 작으냐고 내게 묻지 않았다. 대부분 “키에 비해 다리가 참 길어요.”라고 말한다. 그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어릴 때 둘째 언니 등에 업혀 있다가 언덕 아래로 떨어졌대요.”였다. “업힌 채로 어지간히 까불댔나 봐요.”를 덧붙이면 하하 웃음이 터졌다. 그 바람에 상체는 잘 자라지 못했나 보다. 다행히 팔다리는 잘 자랐는지, 두 팔을 옆으로 펴고 손끝에서 손끝 사이의 길이를 합치면 키보다 10센티 가까이 긴데 그게 원래 사람의 키라더라..... 이후의 대화는 각자 어릴 적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불러내며 화기애애한 웃음으로 마무리될 때가 많았다.
눈앞에서 갖은 걱정과 비통함을 겹겹이 자아낸 사건들이 세월이 지나면 웃음이 된다는 건 생의 신비다. 슬픔이 시간을 입고 발효하면 웃음이 된다. 아픔과 고통을 승화시키면 웃음이 된다. 웃음은 고도의 상징화다. 상징화되었다는 것은 잘 잊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자신과의 화해, 과거의 일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잘 잊은 사람은 잘 웃는다. 그러나 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아프게 기억해 낼수록 잘 잊을 수 있다. 기억하지 않고, 잊지 않고, 웃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웃음이 단지 고통의 대체물일 뿐일 때도 있다. 울지 못하는 얼굴이거나 삐에로처럼 장착된 미소, 기이하게 '웃고 있는 얼굴'. 남의 고통에 무감한 것 또한 자기 아픔의 표현일 수 있다. 느끼지도 못하며 영원히 웃을 수 없도록 석화된 고통자체가 웃음을 빌어 드러나자마자 사라지는 지극한 슬픔으로서의 웃음. 종종, 혹은 자주, 누군가에게는. 그래서인가 인간의 양면성과 현상·사물의 이면을 알아갈수록 사람을 더 이해하고 덜 미워하게 되는 것 같다. 좋음과 맞붙어 있는 나쁨이나 복잡함과 겹쳐있는 단순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의 단순하고 기계적인 삶이 얄팍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마어마한 인간의 복잡함을 엄청난 단순함으로 살아내는 낱낱의 삶이 기적 같을 때가 잦다.
2
대부분의 경우 그렇듯이 그게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둘째 언니는 네 살 여름인 것 같다고 했다. 언니가 나를 업고 있는 중에 내가 언덕으로 떨어졌다는 것. 입학 후에 아이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키가 작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테니 언니에게 물었을 터이고 언니는 일종의 ‘자백’을 한 셈이다. 비탈길을 내려갈 때가 아니어도 가방이 땅에 끌려서 멜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의 2년 동안 언니가 학교를 데리고 다녔으며 가방 역시 언니 차지였다. 그런데 언니의 대답을 듣고 나서도 나는 언덕으로 떨어졌다는 말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언니가 나를 업어주었다는 것만 그저 좋았다.
한참 뒤, 나랑 열한 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의 증언은 좀더 치밀하다. 네 살 여름, 아버지 초상 치르고 나서 얼마 뒤에 다녀가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엄마한테 이러더란다.
“아이고, 아~가 와 이라노.(애가 왜 이러고 있나.) 경이엄마, 아~ 좀 보소.”
“아~가 와?(애가 왜?)”
덜컥 놀란 엄마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살피니 목덜미를 웅크린 채 기운 없이 멍한 아이 모습이 그냥 한 눈에 큰일났구나 싶더란다. 그래서 3년간의 내 병원행과 깁스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둘째 언니의 이야기를 합치면 그 두어 달 전에 언니가 나를 업고 있다가 언덕에 떨어뜨렸지만 이후에 잘 놀아서 다행이다 하고 넘어갔는데 그게 악화된 결과임에 분명하다는 것. 언니는 오랫동안 죄책감이 자주 들었노라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업혔다’는 말이 좋았을 뿐. 사랑받았음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던가 보다.
3
네 살이면 1961년이다. 엄마의 말, 10대에 들었던 걸로 기억되는 몇 문장이 또렷하다.
“어린 게 살라꼬 하루 한 주먹도 넘는 알약을 잘도 묵는기라.”
“영국인가 미국인가 선교사들이 지은 자선병원인데 공짜로 다 해줐다 아이가.”
“그때 병원이 어딨노. 메리놀 병원이 없었으면 니는 죽었을끼다.”
“한 번도 싫다 안하고 주는 대로 약 묵고 주사 맞는 걸 보면 그만......”
이 말을 순서대로 떠올릴 때면 언제나 먹은 것도 없이 목을 꼭 한 번 꿀꺽 삼켜야 했다.
커가면서 엄마에게서 한 줄 한 줄 풀리면서 내게로 온 말들...
“병원을 찾아 가니 숱한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기라.”
“아이고 땡볕에 기다리다가 고만 니가 죽으면 우짜노...”
“아~를 뒷사람한테 맽기 놓고 병원 안으로 우째 들어갔제.”
“하얀 옷 입은 수녀님을 찾아서 아~가 고개를 못든다꼬, 등이 이상하다카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안하나...”
“와 안그렇켔노. 줄 선 사람 앞앞이 사정이 급하지.”
“하염없이 기다리다 내 앞에 세 사람 남기고 병원문을 닫는데, 나는 우짜라꼬...”
“내일 이 순서대로 한다꼬 일찍 오라카데, 그 수녀가. 고맙제,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고...”
“나는 메리놀병원이 니 살릴라꼬 지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마운 사람들이제.”
“3년 걸맀다. 병원 마당에 줄서 기다리는데 니가 살만하다 싶으니 인자 다른 사람들이 보이데.”
“엿목판처럼 목에 띠를 걸어 니를 안고 다녔제. 기브스를 했으니 아~라도 무겁지만 우짜겠노.”
나는 깁스한 몸으로 마루에 누워 멀쩡한 팔다리로 빙글빙글 몸통을 돌리며 먼 산 보고 하늘 보고 바람 소리 듣던 날들을 몸에 담고 있다. 겁없이 활발하게 움직였어야 할 시기에 제 발로 뛰어다니지 못하고 누워서 모든 사물의 소리와 빛과 냄새에 과히 예민하도록 친해졌을 터이다. 네 살에서 일곱 살, 놀아야 할 때 놀지 못한 내 안에 수많은 아이가 갇혀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평생을 애들하고 놀려고 교사가 되었나 보다. 애들하고 놀면서 내 안의 아이-나랑 놀려고 말이다. 아이-나를 키우려고. 그래서 퍽 잘 놀 수 있었던가 보다.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죽지도 않고 빙신이 되지도 않았으니 기적이제, 하눌님이 고맙제......그 수녀의사들이 니 살맀다. 그 양반들 다 죽었을랑가. 자기 나라로 갔을랑가. 궁금할 때가 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지, 남의 나라에 와서...”
3년 동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나는 알고 싶지 않다, 성공인 듯 실패인 듯 반복되는 수술, 생사의 갈림길 따위 말은 더욱 싫다. 하여간 그 3년은 일곱 살에 끝났으므로 이듬해 나는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완전하게 살려주었다. 엄마... 정신분석을 공부하며 십여 년 동안 천천히 애써 더듬어 느껴 왔음에도 나는 엄마를 모른다, 엄마의 심정과 고통을 아직도 가늠하지 못한다. 그 삶의 근처를 한없이 돌고 있을 뿐.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엄마로부터 달아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4
몇 해 전, 나는 부산 메리놀병원을 찾아 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용기였다. 그것은 끈기나 투지만큼이나 나랑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왔던 말, 용기,였다. 나 같은 무섬쟁이가 이런 용기를 내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던 걸까. 부단히 떨기를 멈추지 않는 가운데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열정을, 공포로부터 힘을 길어올리는 일이 용기다. 그 과정이자 형성물이 용기다. 불안은 용기의 재료다. 공포는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용기를 데리고 온다. 용기는 완성된 채로 갖거나 이미 있어서 누군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간절한 바람과 애씀에 따른 질적 변화의 흔적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지는 것의 이름이 용기다.
불쑥 치밀어 나를 마구 흔드는 그것들을 알아챌 때, 직면하고 해석하려는 힘은 불안의 형체를 드러내고 작은 두려움으로 쪼개 가라앉히는 동시에 힘을 길어 올린다. 용기를 만들어 낸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도에 올라타 그것을 부릴 수 있게 된다. 말인즉슨 그렇다는 거다. 함들고 어렵다. 자신을 집어삼킨 것들, 못난 것들, 아픈 것들과 직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힘들면 안 하면 된다. 모른 체 하면 된다. 생겨먹은 대로 굴러가면 된다, 그렇지만 나는 멈추기로 했다. 100세 인생이라니 부디 다르게 굴러보고 싶어서 낡은 동력을 멈추기로 했나 보다.
그렇게 수십 년 내 불안을 인지·가늠하면서 받아들였다. 상상하고 느끼며 아주 조금씩 입으로 꺼내 말하기를 몇 년. 나는 메리놀병원을 찾았다. 접수처에서 당시의 내 병원기록이 있는가 물었더니 없단다.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실망이 컸다. 망연히 몸이 떨려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서있었다. 일시에 힘이 빠져 그냥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고개를 드는데 지나던 수녀님이 묻는다. “자매님 힘드신가요, 도와드릴까요.” 맑은 얼굴과 말소리에 반짝 힘을 얻어 사정 이야기를 하고 병원장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감사를 전하면서 61년부터 64년까지 병원에서 일하시던 수녀님들 가운데 아직 생존하신 분이 계신지 미국 메리놀전교회본부로 연락하여 알아봐주시기를 부탁했다. 전화든 편지든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기대하긴 어렵지만 연락해 보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신부님이 보여준 낡은 사진첩에서 병원 앞에 줄 선 사람들의 사진을, 더러 언덕에 의지하여 앉거나 선 채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았다. 정말 엄마가 있는 것 같고 내가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내려앉았다. 설핏 보았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래고 희미하고 작은 사진 몇 장은 오래전에 발굴된 뼈, 같았으니.
5
돌아와 얼얼한 미열과 비현실적인 감각 속에 지나간 며칠. 엄마와 나의 감사를 100만이란 숫자로 상징화한 뒤 후원금으로 병원에 보냈다. 그리고 생존하신 수녀님을 찾았다는 연락이 오기를, 만나러 미국에 갈 수 있기를 고대했다. 의사 또는 간호사로서 남을 도우며 늙어갔을 그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가난한 남의 나라에서 기쁘게 청춘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당시 그분들의 활동 당시 나이를 젊게 잡아 생존가능성을 넓혔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I owe you my life. 당신께 내 목숨을 빚졌습니다." 너무 자본주의적이지만 영어식 표현이 원래 그러니까. 게다가 요즘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표현이니... 영어로 쓰인 책을 읽으며 자주 기쁨을 느끼거나 영어회화에 종종 관심이 생기는 까닭도 어쩌면 이 한 마디 때문일까. 진정한 감사의 말을 그분들께 전하고 싶어서 말이다. 어쨌든 나는 빚쟁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갚았는지 모르겠다. 갚을 수는 있는 걸까, 조금씩 다른 이들에게 뭔가 되돌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면 무슨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까, 합당한 무슨 선물이 있을까... 울음이 터지면 어쩌나, 손을 잡나, 꼭 껴안아도 될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오래 허전했다. 그러나 이미 열린 시공간으로 깊게 닿고 넓게 통했을 거라고, 오랜 세월 속에 감사는 충분히 이루어졌으며 또한 계속 될 거라고 믿는다. 내가 가톨릭의 형식으로 영세를 받은 것은 이미 네 살 때부터 준비된 일,이라고도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생명들은 얽히고설키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머리 몰래 몸은 진작 겪었을 터이니 말이다. 모든 생명들이 얼마나 저저끔 용감하게 살아내고 있는지 기쁘게 알아가고 있다. 사르르 마음을 채워오르는 따뜻함, 미소를 달고 오는 새로운 생각들... 나는 행복한 지진아. 인간으로서의 동이 튼 새벽부터 지금도 자라는 중.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