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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01. 2021

한 월북 '천재 언어학자'의 파란만장한 삶

<북에 건너간 언어학자 김수경 1918-2002>(인문서원)

일본에서 귀국한 지 두 달여쯤 되던 8월 중순께,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의 이타가키 류타 교수(문화인류학 전공)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타가키 교수는 도시샤대에 있는 코리아연구센터를 오타 오사무 교수(한국근현대사 전공)와 함께 주도하는 학자여서, 오사카에 재직하면서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타가키 교수는 자신이 쓴 책을 보내주고 싶은데,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주소를 알려준 뒤 일주일 정도쯤 뒤에 국제우편으로 두꺼운 책(374페이지) 한 권이 배달돼 왔다. <북에 건너간 언어학자 김수경 1918-2002>(인문서원, 2021.7 출간)이었다. 출간 일을 보니까 책의 잉크도 마르기도 전에 보내준 것 같다.


 그러나 귀국 후 이런저런 정리에 빠쁜 때여서, 바로 읽지 못하고 나중에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마침 코로나 때문에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하면서, 두꺼운 일본어 책 읽기에 도전할 여유가 생겼다. 월북 언어학자의 평전이어서 딱딱한 내용이겠지 하면서 책장을 펼쳤는데, 펴는 순간부터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거짓말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김수경이 월북한 뒤 겪은 개인 및 가족사가 너무 극적인 것에 더해, 이타가키 교수의 능숙한 글쓰기 솜씨가 잠시도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책의 주인공 김수경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를 포함해 14개 국 언어를 구사하고, 이 중 7개 국어는 원서를 바로 번역하면서 강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천재 언어학자로, 북한의 언어학을 수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하던 중 부인과 아들딸 등 가족과 헤어져 수십년 동안 편지 교환도 만나지도 못하다가 극적으로 재회한다는 이야기 줄거리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런 극적인 소재를, 이타가키 교수가 인류학 연구를 통해 다져진 필력으로 영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생생하게 복원해 주고 있다. 인류학의 장기인 현장 연구가 제한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관련자들의 인터뷰와 엄청난 양의 자료 수집, 언어학 관련 연구서 섭렵 등을 통해 그런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김수경의 개인 및 가족사와 북한에서의 언어학 전개 과정을 대위법처럼 교대로 배치한 구성이 그의 생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줬다.


 이타가키 교수가 김수경이란 인물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2010년 3월 캐나다 토론토에 다른 조사 연구를 위해 우연히 김수경의 딸 김혜영씨와 저녁 자리에서 그의 아버지와 가족의 이산, 그리고 재회 등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된 것이 김수경이란 인물에 꽂힌 계기가 됐다. 2013년 그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을 도시샤대에서 개최한 것을 비롯해, 그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자료 수집과 관련자 인터뷰 등을 해왔다. 그리고 시작부터 11년 만에 그의 평전을 탈고했다.


 이 평전은 단지 김수경이란 천재 언어학자에게만 초점을 맟춘 것이 아니다. 형식은 김수경 평전이지만, 내용은 '김수경'이란 프리즘을 통해 김일성 유일체계 확립 등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은 북한의 언어학의 전개와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빚어진 가족의 비극을 다룬 총체적인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타가키 교수는 <끝나는 말>에서 최근의 학문 상황(또는 언론 상황)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이 책을 그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썼다고 밝혔다. 그는 불만의 내용을 '북한에 대한 극히 편향된 지적 관심' 등 9가지를 들었는데, 나도 거의 동감하는 내용이다. 인터넷을 살펴 보니,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이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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