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6화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으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내가 마이크를 잡고 있는데 마치 마이크가 내 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간단하게라도 소개나 인사를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데 열심히 준비한 말들은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내 입 안에 느껴지는 물컹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혓바닥인지 가슴에서 튀어 올라온 심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살폈다. 스카이트레인 역 앞 사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주어진 오늘 분량의 삶이 그렇게나 바쁜 건지 악기와 마이크를 들고 지금부터 난리 부르스를 한 번 피워보겠다는 아우라를 뿜고 있는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순간 내가 원망스러웠다. 이왕 할 거면 밴쿠버 시내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서 해야 한다며 패기를 부렸던 한 달 전의 나도, 인사말 커닝페이퍼조차 준비하지 않고 나를 과대평가한 어제의 나도.
“하, 하이 에브리원. 위 아……”
하고 겨우 입을 떼면서도 땀이 나도록 꼭 붙잡고 있던 마이크 스탠드도 야속했다. 네가 조금만 더 뚱뚱했다면 내가 숨을 수 있을 텐데. 지난여름 내 인생 첫 버스킹을 한 날이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12월 31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한 의식의 일종으로 내가 빠뜨리지 않고 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버킷리스트 갱신’이었다. 처음에는 새해 목표였지만 어느 순간 버킷리스트라고 의식의 이름을 바꾼 것은 그다음 해의 12월 31일이 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밑밥 깔기라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신년 계획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 세울 만큼 세워보고 실망할 만큼 실망해 본’ 역사가 일 년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고 꾸준히 알려줬으니까. 신년 목표 리스트는 올해 안에 꼭 이뤄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에 비해 버킷리스트는 마감기한이 너그러운 편이어서 작년에 썼던 것을 올해 또 적으면서도 마음이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버킷리스트 중 매년 빠지지 않고 갱신되던 것이 바로 버스킹이었다. 새 일기장 첫 번째 페이지에 '버스킹 하기'라고 적어 넣을 때만 해도 그 항목을 올해 밴쿠버에서 ‘체키라웃’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생 때는 노래 동아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직장인 때는 직장인 밴드 모임을 회사보다 열심히 다니고 캐나다에 와서는 음악 관련 컬리지를 다니고, 지금은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 버스킹을 다닐 만큼 음악을 사랑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음악이나 노래라면 질색했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질색팔색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엄마가 보낸(다 나 잘 되라고 보냈을 게 분명한) 어린이 노래교실이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를 엄마는 토요일이 되면 내 손을 잡고 어린이 노래교실에 데려갔다. 90년 대 당시에는 백화점 안에 마련된 어린이 극장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문 강사들을 초빙하여 아이들에게 동요와 율동을 가르치게 하는 어린이 동요교실 같은 문화 활동이 유행했었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는 당신의 ‘노래 유전자’가 딸에게도 유전됐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사회성을 기르는데도 어린이 동요 교실만 한 활동이 없을 거라 판단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당시 나는 유치원에서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나를 괴롭힌 아이들도 싫었고 그런 아이들을 낳은 어른들도 싫었다. 그냥 모든 사람들이 다 싫었다. 나중에서야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동요 교실은 극장 관람석에서 무대 위에 올라간 강사가 알려주는 대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식이었다. 앞, 뒤, 좌, 우 할 것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어른과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부산스러움과 소음을 견디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까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참석자들에게 주어진 한 시간 중 마지막 15분이었다. 강사는 관람석에 앉아있던 아이들을 전부 무대로 불러냈다. 아이들을 합창단의 모양새로 줄 맞춰 세우고는 지금까지 배운 동요를 부르게 했다. 작은 키 하나 믿고 맨 뒷줄 구석에 엉거주춤 대충 숨어 있다 내려오곤 했는데 하루는 나를 발견한 강사가 나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어깨를 잡고는 맨 앞 줄로 끌어냈다. 삼십 년에 지난 지금도 나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수 백개가 넘는 학부모들의 눈들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린이 극장 무대는 5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았고 먼지가 뽀얗게 싸인 자주색 발치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입을 뻥긋하며 노래하는 척하는 15분 내내 지금이라도 무대 밑에 기어들어가 숨어있다가 모든 것이 끝나면 나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대인기피증이 있던 내게 무대공포증이 없을 리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노래나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고 믿었다.
그러다 우연히 노래가 내 삶에 들어온 것은 중학교 때 친구를 통해서였다. 노래를 좋아하던 짝은 매일 노래를 녹음해 들려주고 나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노래에 대한 일가견이 있을 리 없던 터라 딱히 심사평을 해줄 것은 없었다. 워낙 노래를 잘하던 친구라 그의 녹음파일은 몇 번을 들어도 지겹지 않을 만큼 듣기 좋았고 그 느낌을 솔직히 말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노래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듣다가 깨달았다. 노래가 위로가 된다는 걸. 그리고 매일 노래 연습은 몇 시간씩 한다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짝의 표정을 매일 보다 보니 조금씩 노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고 찾아 듣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면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컴퓨터부터 켰다. 90년 대 후반에 나온 대한민국 최초의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였던 ‘벅스’ 때문에 수능 공부를 망친 것 같지만 ‘벅스’가 없었다면 아마 내 청소년기가 통째로 망했을지 모른다. 여러모로 우울한 내 청소년기는 패닉의 음악과 함께였다. 그들의 음악을 틀면 <내 낡은 서랍 속의 깊은 바다>에 사는 <달팽이>가 기어 나와 <왼손잡이>였던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학교와 사람들 사이에서 <오기>로 버티던 내 인내심의 <균열>이 <눈 녹듯> 녹았고 영원히 놓친 줄 알았던 <희망의 마지막 조각>을 <다시 처음부터 다시> 꿈꿀 수 있었다.
*<>(꺾쇠 괄호) 처리 된 것은 모두 패닉의 노래 제목
누가 말을 시켜도 응, 아니 밖에 할 줄 몰랐던, 감수성이라고는 고산지대에서 말린 황태 같던 내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정반대로 변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내 안의 어떤 벽이 무너지듯, 그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눌려 있던 감정이 둑을 잃은 물길처럼 저항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걸 ‘사춘기 감수성’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가 사랑한 모든 노래의 가사들이 전부 내 이야기 같고, 멜로디는 내 감정의 다이내믹에 적확하게 들어맞았으며 드럼 소리는 내 심장박동을 따라 울리는 것 같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그건 그냥 그 나이 때 한 번씩은 겪는 과정이었다. 나 같은 아이들이 오죽 많았으면 어른들이 ‘사춘기’라는 단어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을까.
사람이 싫어서 노래가 싫었는데 노래가 좋아지면서 또 노래를 하면서 그 덕분인지 어느 순간 대인기피증도 무대공포증도 많이 사라졌다. 아마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네가 무슨 대인기피며 무대공포냐며 비웃을 지도 모른다. 내 안에 기피와 공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연기력이 는 탓이다. 굳이 드러내서 좋을 것이 없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문제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혹은 완벽히 극복하는 것보다 확실히 품이 덜 더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닌 척’, 혹은 ‘그런 척’ 하는 게 거짓 같고 가식 같아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아무렴 어떤가 싶다. 전에 내가 인용했던 훌륭한 명언을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가식도 3년이면 인성’이니까. 언젠가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연기와 진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살고 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 할 때면 여전히 달팽이가 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샤워 커튼 뒤에서 내 마음대로 목청을 뽑는 노래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부르는 노래 사이에는 토론토와 밴쿠버만큼 멀고 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등에 달린 집 안으로 웅크려 숨어들 수 있는 달팽이는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등에 달린 집이 없어서, 마이크 스탠드 뒤에 숨기엔 내 몸집이 너무 커서 사람들 앞에 서는 연습을 억지로라도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조금씩 기피증도 공포증도 많이 좋아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옛날 무대 위로 발을 끌어올리며 마음은 무대 밑으로 한 없이 달려갔던 아이는, 결국 달팽이는 되지 못했지만 패닉의 노래처럼 넓고 거칠은 바다를 건너 이제는 밴쿠버에서 버스킹도 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