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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Nov 13. 2024

똑똑, 그 다음 생각 들어오실게요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5화

MBTI 성격 유형 중 감각형(S형)은 머리를 감을 때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N형(직관형)은 머리에 샴푸질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는 글을 SNS에서 보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생각을 안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도 있다는 거야, 지금!? 비단 머리를 감을 때뿐이겠는가. 양치질을 할 때, 발을 닦을 때, 손톱을 자를 때, 상황과 관계없이 생각은 당연히 계속하는, 아니 나는 거 아니었어?! 잠시 심장을 10초 정도만 멈춰봐야지 한다고 불수의근인 심장근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내게는 머릿속 생각도 잠시 비워봐야지 마음먹는다고 비워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게는 머리를 감을 때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감각형의 사람들의 능력이 심장박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귀를 손가락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능력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명상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아니 사실은 자기 계발서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가 명상이라고 적혀있길래 무엇으로 성공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일단 실패한 사람은 되고 싶지는 않아서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에 대해 ‘ㅁ’자도 몰랐기에 일단 되는대로 유튜브를 틀어놓고 시작했다. ‘명상’이라고 검색해서 첫 페이지에 뜨는 거의 모든 영상을 다 클릭해 보았지만 전부 비슷한 대목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콘텐츠의 대사는 대부분 비슷비슷했는데 그중 마음을 편안히 하고 머릿속 생각을 비우라는 말에 점점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마음먹었다고 비울 수 있으면 가부좌를 틀지도, 유튜브를 틀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래도 간혹 어떤 영상에서는 생각을 억지로 비우려 하지 말고 생각이 머물렀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어도 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집착도 없이 편안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며 나를 다독여주기도 했다. 참 좋은 말, 아름다운 말 같았다. 내게는 크게 효용적이지 않다는 것만 빼면. 하나의 생각이 머물렀다 흘러가면 또 다른 생각이 바로 치고 들어오기 바빠 명상하기 적합한 머릿속 상태를 유지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그다음 생각, 그다음의 다음 생각들은 참을성도 예의도 없는 놈들이라, ‘저기, 어제 말 실수한 기억 님, 일 다 보셨으면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내일 사야 하는 식료품 목록을 아직 못 정해서, 좀 급하거든요’ 따위의 양해를 구하고 들어오는 법은 없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듯 먼저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허락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다음 생각에게 반항 한번 못하고 자리를 빼앗기고 말 뿐이었다. 분명 10분짜리 명상 콘텐츠를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끄러운 유튜브 광고에 정신을 차려보면 명상을 했다는 느낌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포기했다.


내가 집순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만 해도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시작되는 각종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져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없다면 하루종일 누워 생각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지난날의 흑역사가 떠오르기도 하고, 내일모레까지 해야 하는 일 목록을 정리하기도 하고, 냉장고 속 음식들의 상태가 어떤지 떠올리기도 하고 뜬금없이 미디어 속 연예인에 빙의해 잘 나가는(?) 내가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불속에서 해야 할 생각이 많은데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거나 일부러 외출을 한다는 건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람이거나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고백하자면 혼자 있는 시간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은 사실 생각의 양도 양인데 ‘효율덕후’인 것이 좀 더 심각한 문제다. 내 생각의 90퍼센트는 ‘효율 찾기’를 위한 고민이다. 아침에 눈을 뜬 후 상상하기 세션을 겨우 끝내고 이불속에서 겨우 기어 나오면서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옷을 주섬주섬 벗다 보면 어디에선가 들은 찬물샤워의 효과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왕 할 샤워니까 이참에 몸과 마음에 좋다는 찬물 샤워를 해보면 어떨까. 문제는, 찬물 샤워를 해보고 싶긴 한데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왜 좋다는 건지 과학적인 원리를 알고 나면 용기도 효과도 극대화될 것 같아서 옷을 반쯤 벗다 스마트폰을 들고 구글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도파민의 과학적 메커니즘까지 공부하게 된다. 공부는 이쯤 하고 이제 실제로 액션에 돌입하기로 한다. 욕조에 발을 넣으려는데 욕조 가장자리 시뻘건 물때가 보인다. 아무래도 욕조청소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오랜 시간 청소를 하려면 자고로 음악은 필수지. 청소의 효율을 극대화시켜줄 플레이리스트가 절실한 순간이다. 고민 끝에 선별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고 볼륨 조절을 하는데 이상하게 스피커의 밸런스가 어째 좀 안 맞는 것 같다. 혹시 고장이 난 건 아니겠지? 스피커 앞에 서서 좌우 스피커의 균형을 확인한답시고 벌거벗은 채로 소머즈에 빙의한다. 사실 아마존에서 중고로 산 저렴한 스피커라 딱히 체크할 것도 없고 게다가 내 막귀로는 밸런스가 틀어졌다 해도 어차피 알아차릴 리도 없다 싶어 관두기로 한다. 그것보다 청소 전에 빨래를 돌려놓으면 여러모로 시간 쓰임이 효율적이겠다 싶어 빨래부터 돌리는 게 낫겠다 싶다. 세탁기에 옷가지며 수건들을 때려 넣다 보니 갑자기 이불빨래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이참에 이불도 걷어 내기 시작한다. 이불을 걷어내는 김에 전기담요도 찾아 깔자 싶어 작년 봄에 치워둔 전기담요를 찾아 온 집 안을 뒤진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바닥에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현타가 찾아온다. 나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최초의 계획이 뭐였는지 겨우 기억이 나자 헛헛한 웃음이 난다. 샤워 한 번 하려다 온종일이 지나겠네. 이런 건 기록했다가 언젠가 글 소재로 써야지. 스마트폰을 열어 방금 있었던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는데 갑자기 오랫동안 답장을 못한 채 읽씹을 해버린 누군가의 문자가 떠올라……


모순적이게도 효율을 위한 고민을 하느라 실천으로 옮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고민하는데 열정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나머지 애초에 시작을 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있어 효율 0퍼센트에 수렴하기도 한다. 두서없이 밀려오는 생각들이지만 조절 및 통제만 되면 영원히 지루할 일 없는 놀이도 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내가 원할 때 그만두거나 생각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한 번은 친구 H에게 떨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친구였기에 어떤 방법이든 기꺼이 따라 해볼 의향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좀 의외였다.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생각을 떨치고 싶은 자신의 내면을 시청자들에게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해서 과장된 몸짓으로 하는 그 행동 말이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며 묻자 그 친구는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가 실제로 있냐고 묻는 내 질문에 과학적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심리적 효과 때문인지 복잡한 생각의 고리가 좀 끊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나도 나만의 의식(?) 같은 대안을 정해두고 따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일단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마치 혼란을 겪고 있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다. 끝없이 밀려오는 생각을 끊어내고 싶은 순간은 대부분은 이불 속이기 때문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됐다. 그러고 나서 찬물 샤워를 하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가든 한다. 다른 자극을 주는  환경에 고의적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이다. 사실 그런다고 해서 머릿속 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머릿속 분위기는 좀 바뀌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하는 생각의 장르는 우중충한 스릴러나 우울한 신파극에 가까웠는데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를 걸을 때는 희망 가득한 하이틴물이나 웃긴 시트콤처럼 변했다. 전자나 후자나 진부하고 상투적이긴 마찬가지였으나 분위기가 바뀌는 건 결론적으로 꽤 큰 차이를 가져왔다. 게다가 전자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는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생각만 하고 싶은데(정확히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비해 후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생겼다. 그건 생각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고 때로는 생각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로 생각보다 많은 해결책을 주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는 일, 쌓여있던 설거지를 해치우는 일, 몇 달간 묵은 먼지를 닦아내는 일처럼 사소한 움직임이 회전력이 되어 생각의 방향을 틀어주었다. 그럴 때는 오랜 시간 주머니 속에 방치된 이어폰 줄처럼 이리저리 꼬였던 중구난방의 잡생각들이 가지런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내 머릿속에 작동하는 텔레비전은 비록 온오프 버튼이 없지만 적어도 채널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리모컨을 무기력에게 뺏기지 않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효율’을 돌 보듯 하라. 드라마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라. 공든 탑이 된 설거지부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산책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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