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30화
코로나 시대는 우리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심에는 마스크가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만을 접하며 성장한 아기들이, 문득 맨 얼굴을 드러낸 어른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불안해했다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난다. 잠시 36개월 이하 아기들에게 빙의해 보면, 세상에, 얼마나 놀랐을까. 평생 눈과 눈썹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얼굴 아래 갑자기 코와 입이라는 낯선 형체가 출현했을 때 느낄 아기들의 충격과 당혹감이라니. 이는 마치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윗옷을 벗었는데, 그 안에서 또 다른 한 쌍의 팔이 튀어나오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스크는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것을 넘어, 우리에게 익숙했던 인간의 얼굴이라는 풍경 자체를 재정의했다.
마기꾼이라는 신조어 개념도 생겼다. 마스크와 사기꾼의 합성어였다. 마스크를 착용했을 때 매력적으로 보이던 이가 마스크를 벗었을 때 기대와 다른 모습으로 다소 실망감을 유발하는 경우를 지칭했다. 보이는 부분에서 높은 인상을 받을수록, 가려진 부분에 대한 기대치 또한 그에 상응하여 높아지기 마련이다. 눈썹이나 눈매와 같이 마스크 위로 드러나는 부위는 화장이나 간단한 시술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인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반면, 콧방울의 형태, 콧구멍의 각도, 입매의 모양, 하관의 윤곽 등 마스크 아래에 가려진 부분은 근본적인 변화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스크 위쪽 얼굴로 매력적인 인상을 만들기는 용이하지만, 마스크 아래쪽 얼굴만으로 그러한 인상을 유지하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에 '마기꾼' 현상은 의도적인 사기행각 혹은 기만이라기보다는, 마스크가 얼굴의 윗부분이 아니라 아랫부분을 가리기 때문에 만들어낸 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나는 보이는 부분도 개선시킬 의지나 행동에 옮기는 성실함이 전혀 없었으므로 코로나 시절 마기꾼도 되지 못했다.
코로나는 그 시절이 끝나고 나서도 내 일상에 영향을 미쳤다. 마스크가 품귀 현상이 있고 난 후 강박이 생겼다. 무려 세 장의 만 원짜리 지폐와 겨우 한 장의 마스크를 교환하며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다. 쌀은 떨어져도 절대 마스크가 떨어질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마치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그 종류에 상관없이 모으기 시작했다(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에디션이나 동물의 이목구비가 그려진 것들도 아직 어딘가 있을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습관이 되어 버린 마스크를 제2의 피부처럼 여겼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챙기지 않고,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목도리를 챙겨본 적 없으며, 30도가 넘는 날에도 여분의 자외선차단제를 챙겨본 적 없는, 외출을 할 때 무언가를 챙기는 걸 세상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이례적인 습관이었다.
집착의 이유가 더 이상 청결이나 위생에 대한 염려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 뒤에 숨었을 때 느끼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쉬기도 힘들고 일회용 마스크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가 거슬렸지만, 그런 물리적 불편함보다 가려질 수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이 더 커졌다. 이제는 얼굴의 반을 가리지 않으면 마치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여름날 외출처럼 어색하고 불안하다. 심리적 안도감은 과연 마스크의 순기능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의존성이라는 부작용으로 보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이었다면 자외선에 민감한 중년 여성들의 햇볕 가림용 마스크라도 종종 만나 덜 외로웠을 텐데, 햇볕 차단용 마스크는커녕 양산을 쓴 사람도 산삼보다 귀한 캐나다에서 2025년에 얼굴을 가리고 다니다 보면 가끔 혼자라는 기분과 함께 어쩐지 페어플레이가 아닌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마치 누드비치에 혼자 옷을 입고 들어간 것처럼, 모종의 죄책감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더니, 아무래도 익명성에 기댄 자유인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 나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충 쓰레빠(슬리퍼)를 대충 끌고 치약 묻은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어도,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스타일의 복장을 할 때도(물론 귀찮은 걸 싫어하므로 전자의 경우가 99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내 입보다 조금 큰 부직포 뒤에 숨기만 하면 쓰레빠(슬리퍼)의 추레한 뒤축도, 치약 얼룩도, 난해한 스타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적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타조처럼 나는 순수하게 안도했다. 얼굴을 항상 반쯤 가린 나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답답해하는 동시에 궁금해했다. 그냥 습관 돼서 이게 편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식료품 마트에서도 누가 내 어깨를 움켜쥐며 아는 체를 했고, 집으로 오는 길에 누군가 50미터 앞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 오기도 했다. 두 번째 방문한 어느 카페에서 며칠 전 오셨던 분이시죠? 라며 아는 체를 받았고, 동네 산책을 하는 도중 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이 등 뒤에서 나를 불러 세우기도 했다. 눈만 내놓고 있는 나를 알아봤던 그들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철저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나는 쓰레빠와 치약 얼룩과 기름진 머리를 장착한 자유로운 '아무나'가 되어 있던 상태였으므로 당혹스러움은 더욱 컸다.
처음에는 어떻게 눈만 내놓고 있는 나를 알아보는 거지? 내 눈썹이 그렇게 독보적인 존재감이 있다는 거지? 헛다리를 심하게 짚기도 했다. 나만 모르고 다 알고 있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은, 내가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본 게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자유를 위해 껴입은 익명성이 오히려 '나'라는 존재성에 형광펜을 칠하듯 하이라이트를 먹인 셈이었다. 마스크 착용이 강제가 되었던 시절이 끝난 지 수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에서 코와 입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은 머리를 빨주노초파남보로 물들인 사람보다 희귀했다. 좀 과장하자면, 내 이름 석 자가 쓰인 손바닥 만한 견출지를 얼굴에 붙이고 다닌 격이었다. 누군가를 알아보기 위해 얼굴 전체를 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종종 보는 사람들에게 내 얼굴은 이마와 눈, 코의 윗부분 그리고 부직포 덮개로 구성된 신체 부위였을 것이다. 아마 이마만 빼고 전부 가리고 다녔어도 나인 걸 알아봤겠지. 나는 꽤 충격받았다.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너무 쉽게 알아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당연한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 때문에.
익명성에 처참히 실패하고 난 후, 그 안에서 얻으려 했던 안정감과 자유라는 순수한 바람 이면에, 또 다른 욕망이 숨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향한 조망과 관찰을 확보하겠다는 이기적이고 은밀한 욕망이었다. 높은 곳에 자리한 부유층의 저택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권력의 위계를 설계하듯, 표정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일방적인 시선이 완성되고 그로 인해 관계 권력의 비대칭성은 아주 손쉽게 생성된다. 나는 불균형한 시선이 가져다준 권력을 누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그냥 투명한 가면을 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투명하다는 속성은 가면의 존재 이유를 무용하게 만든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목적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작전 전환이 시급했다. 애초에 먹힌 적 없는 작전이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이 얼른 버려야 마땅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해리 포터에게 투명망토를 빌리거나, 복장을 매일 바꾸는 변칙 위장을 하거나.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찾아낼 확률은 희박하므로 해리에게 투명망토를 빌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위장 교란만이 유일한 해답인 것 같다. 매번 다른 모습을 하여 적군, 아니 타인이 내가 '나'임을, 식별하지 못하게 교란하겠다는 전략이다. 아무나가 되고 싶어 숨고 싶었는데, 제대로 숨으려면 아무나가 되는 거라니...... 결국 그냥 아무나가 되면 될 일이었잖아?! 그런데 외출할 때마다 모습을 다르게 꾸미는 건 품이 상당히 많이 드는 일이므로 게으른 내가 펼칠 수 있는 전술은 아니었다.
바짓가랑이를 찢어 뜨리며 겨우 울타리를 넘어 달렸는데 가다 보니 담을 넘기 전 같은 장소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개기름과 땀, 그리고 자외선 차단제 때문에 꼬질꼬질해진 하늘색 가면을 쓰고, 뫼비우스의 띠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없다.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마스크를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마스크를 착용함으로 인해 나를 아무도 못 알아볼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기로 했다. 까짓것 알아볼 테면 알아보라지. 내려 놓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몰래 누구라도 되어보겠다는 욕망은 실현 불가능 해졌지만, 그리고 아무나 되어도 괜찮다는 배짱도 부릴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포기 못하는 데는 여전히 충분한 이유가 있다. 웃어야 하는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되고, 울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 울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음 편하게 졸 수도 있다. 입을 한 껏 벌린 채 졸다가 목이 뒤로 확 젖혀지면서 화들짝 깼을 때 민망해하지 않아도 되고, 턱 밑에 흐르는 침 때문에 단잠에서 깨지 않아도 된다.
물론 언젠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아무나 되어도 아무렇지 않는 그날이 오기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