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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의 끝을 잡고,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27화

by 황서영


대학교 졸업보다 입사를 먼저 앞둔 어느 해 겨울 나는 갑자기 배낭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3학년 때 인턴을 한 회사에 운이 좋게도 정규 채용이 결정되어 4학년 2학기를 여유롭게 보내던 중이었다. 하지만 언제 입사 통보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해외여행을 갈 상황은 아니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해외에 나가게 되면 이메일조차 쉽게 확인할 수 없었으니 입사통보 연락이 와도 확인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가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인도.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회사의 노예가 되기 전 내가 할 수 있는 미친 짓은 한 번쯤 해봐야 여한이 없지 않겠냐며, 이왕이면 최선을 다해 미친(?) 여행지면 더욱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배낭여행지로 최대한 무모하고 특이하고 용기 있어 보일(?)법한 곳으로 인도만 한 곳이 없겠다고 결론 내렸고, 두 번째 이유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수평선에 지는 석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12월의 어느 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검색 최저가 (그래서 환불은 언감생심, 심지어 출국 입국 날짜 변경도 되지 않는) 중국 항공권을 결제했고, 인천공항을 떠나는 순간 아무런 쓸모가 없어질 폴더폰을 배낭 구석에 적당히 쑤셔 넣은 채 생소한 중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내게 닥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대엿새가 되던 날이었다. 유명한 포털 사이트의 배낭여행 카페에서 추천하는 길거리 음식을 찾아가 사 먹었다. 계란을 스크램블해 이것저것 섞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만든 토스트랄까 오므라이스랄까 여하튼 둘 중 어떤 것으로 불러도 별 문제없을 것 같은 음식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훌륭한 맛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정도는 아닌, 점심 한 끼 때우기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 내 주관적 의견으로는 5점 만점에 별점 3.4점 정도 주면 후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3.4점짜리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은 지 정확히 1시간이 지난 후 내 인생 최악의 고통이 시작됐다. 오한과 발열을 넘어 복통, 설사, 그리고 구토까지...... 인도 호텔(은커녕 여인숙 수준도 안되었으나) 방에서 3대에 걸쳐 66년 동안 한 번도 빨지 않았을 것 같은 이불이 마치 유일한 구원자인 듯, 마치 인생 마지막 애인인 듯 치열하고 처연하게 껴안으며 한국에서 가져온 타이레놀을 겨우 삼켰지만 열이 조금 내리는 척하더니 다시 오르며 결국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내가 모유를 먹고 자란 아기였는지 아닌지 아무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 이렇게 말하긴 좀 뭐 하지만 젖 먹던 힘이었을 수준의 에너지를 써서 배낭 바닥에 구겨져 있던 폴더폰을 겨우 꺼내 충전했다. 오랜만에 열어본 폰 화면에는 아름다운 숫자가 떠 있었다. 12 24, 크리스마스이브. 계획한 3주간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진료를 받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바이러스 성 장염이었다. 하루 이틀 게워내고 싸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증상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까지 조금도 호전되지 않고 되려 악화되었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구매했었기에 귀국 비행 편을 앞 당길 수도 취소할 수도 없었으니 여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귀국 비행기 표를 버리고 새 비행 편을 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입사를 앞둔 대학 막 학기 졸업 예정자의 주머니 사정으로서 쉽지 않은 고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결국 인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고 최초의 계획 그대로 뉴델리에서 시작해 6개의 도시를 거쳐 바라나시까지 간 다음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내가 인도여행을 최근에 갔었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야속한 숫자 12 24를 확인한 후 씁쓸하게 폰을 접는 대신, 스마트폰으로 최저가 비행 편을 검색하고 폰에 저장된 신용카드로 적당히 저렴한 항공권을 결제한 뒤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지금에 비해 당시에는 포기에도 많은 에너지 소모와 비용이 들었다. 이메일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도시에 몇 없는 인터넷 카페를 찾아가서는 이용료를 지불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최소 30분, 그리고도 10분여 동안 포털사이트 화면이 다 뜨길 기다리는 것뿐 아니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또 10분 정도를 기다려야 겨어어 우우우 우 로그인이 됐다(만에 하나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따위의 네트워크 오류가 뜨면 처음부터 다시......).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는 나이 든 꼰대가 된 느낌이 들어서 이런 표현을 하고 싶지 않지만, 손가락으로 터치 한 번이면 0.5초 만에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었고 또 그곳이 인도여서 더 그랬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계획한 여행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결심, 즉 포기를 하는 것도 애초에 여행을 마음먹은 것만큼이나 만만치 않는 결정이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엑셀파일에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 일정을 짜면서 이동수단까지 미리 계획에 넣어왔지만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기에 막막했다. 국제공항이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인지, 공항까지 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한국행 비행 편이 있긴 한 건지 미리 조사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픈 채로 여행을 마친 그 용기와 끈기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포기할 용기(?)가 없어 좀 더 익숙한 선택지를 택했다고 하는 게 맞다. 그래도 그게 아무리 사실이었대도 증상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에서 60리터짜리 배낭과 침낭을 메고 먼지바람 날리는 중부 인도를 걷고 또 걸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좀 정신승리다. 사지 멀쩡한 지금의 나에게 경비를 다 대줄 테니 다시 그런 배낭여행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 해 온다면 나는 그 제안을 아마 미련 없이 거절할 것이다. 십 년이 훌쩍 넘은 그 인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막을 횡단하던 기차 화장실 바닥의 빗살 무늬다. 땅 덩어리가 넓은 인도는 근접한 도시를 잇는 기차를 타도 기본 12시간이었다. 진짜 어마어마한 아수라장이었다. 사막을 횡단한다는 기차에 창문이 없었다. 아예 없었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있었는데...... 없었다. 반쯤 열린 채로 고장 나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 거나, 무슨 이유에서 선 창문이 깨져 있었는데, 얼굴에 아무리 스카프를 휘감아도 얼굴에 뚫린 7개의 구멍은 모래로 가득 차 10분마다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풀어내고 뱉어내고 울어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것뿐이면 감사하지. 사막 모래 먼지의 횡포에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내 오장육부에 들어와 있던 바이러스는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 기세를 세웠다. 기차 객실도 이미 난장판이었으나 그래도 제정신에 객실에서 실례를 범할 수는 없기에 꾹꾹 눌러 참다가 화장실이 비는 순간 후다닥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간 후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오지 못했다. 흔들리는 기차 화장실 변기에 대고 구역질을 해대는 동안 좀 헷갈린다 생각했다. 장염 때문에 내가 토하는 건지, 푸세식 변기 아래에서 올라오는 백이십 년쯤 묵은 것 같은 인분 냄새 때문에 내가 토하는 건지. 무엇이 진짜 이유인지 사실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쨌거나 내 오장육부는 지긋지긋한 토악질과 설사를 (제발) 멈춰줄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인도중부 사막을 횡단하는 기차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까마득한 변기 아래로 빠지지 않기 위해 뭐라도 잡아야 할 것 같았으나 주위를 둘러봐도 잡을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별 수 없이 몸을 납죽 숙였다. 그때 내 눈앞에 있던 화장실 바닥의 빗살 무늬가 아직도 선명하다. 볼일을 보다 똥통으로 빠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끄럼 방지 차원에서 신경 좀 썼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비싼 돈을 주고 침대칸을 샀으나 침대 위에서 허리 한 번 펴보지 못하고 화장실 변기와 씨름하다 기차에서 내렸다.


신기한 것은 여행 내내 그렇게 아팠으나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보면 전부 행복하게 웃고 있다는 거다. 양볼이 좀 홀쭉해 보인다는 것만 빼면 아픈 사람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해 보인다. 그 비밀은 아마도 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힘든 순간이 곧 지나갈 것이라는 따위의 믿음이 아닌, 팔딱거림의 생의 의지로 가득 찬 여행의 순간이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이면 호전될 줄 알았던 증상이 보름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는 이 고통에 대해선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여행은 달랐다. 출력해 온 비행기 귀국 편에 찍혀 있는 그 날짜가 오면 나는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를 것이고 미련이 있든 없든 이 여행은 끝이 나버릴 것이었다. 흙먼지가 콧구멍을 파고 들어오는 사막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나는 진심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곤 했는데 그건 이 순간이 곧 끝나버릴 것이라는 걸 자주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김연수 작가는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아무리 힘들더라도 여행하는 동안에는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애쓴다. 여행에도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김영하 작가도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행의 중반이 넘어서면 집이 그리워져서 나태해지려 하지만 여행이 곧 끝난다는 사실이 그 나태함을 막아선다. 마치 갑자기 죽음을 앞둔 사람의 그것과 비슷한 심리다'. 훌륭한 작가들은 글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깊은 일가견이 있나 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삶의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게 있다는 거다. 그건 바로 '끝'이었다. 괴로움으로 가득 찬 생이 그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끝을 자각하는 순간인 것처럼, 내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가슴에 품지 않았다면 인도 여행의 순간순간을 결코 온전히 느끼며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작가는 매일 죽고(잠이 들 때) 매일 다시 태어나는(다음날 아침) 존재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완벽한 생을 채우는 온전한 하루인가.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아침에 잠에서 깨고, 죽어도 여한 없는 풍만함으로 다시 잠이 드는 것. 나도 어쩌면 그 마음을 매 순간 인지하고 싶어서 자주 배낭을 꾸리는지도 몰랐다. 자주 리셋되어, 우리의 생이 더 짧은 분절 주기로 인식될수록 우리는 좀 더 자주 각성할 수 있고, 그건 망각의 나태함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젖 먹던 힘'과 '나태함을 막아서는 힘' 따위의 절박함과 죽음의식처럼 대단하고 거창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그럴 만한 통찰력도 없다). 그런 것들을 말하려면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부담이 생기기도 한다. 다만, 매 순간의 끝을 인식하는 마음 상태가, 나태함의 방패 대신 현재에 집중하는 렌즈 정도였으면 딱 좋겠다 싶다.


나는 인도에서 돌아온 날 새벽 응급실에 실려갔다. 인도 기차의 화장실 바닥 무늬처럼 십여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금식' 팻말이 내 침대에 걸린 사흘 째 되던 날 옆 침대 아주머니의 두 딸이 병문안을 온 날이었다. 입원실 천청을 바라보며 한 일자로 누운 채 나는 양손을 아랫배에 다소곳이 포개 올리며 생각했다.


'이건 분명 튀겨낸 지 40분도 채 지나지 않은 후레쉬한 놈만이 뿜어낼 수 있는 온도, 습도, 그리고 향기 임이 분명하다.'


따뜻하고, 바삭하게 기름지고 매콤한 양념치킨 냄새가 2인실 병실에 진동하는 순간, 나는 우주에게 물었다.


'인류애는 여전히 살아있는가?!'


'나태함을 막아서는 힘', 그리고 '젖 먹던 힘'이 필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인 것 같았다. 수없이 되뇌며 나는 그 시간을 무탈하게 견딜 수 있었다. 옆 침대의 치킨 파티는 결코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이 향기가 병실에서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공기로 이 공간을 금세 채울 것임이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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