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24화
벌써 6년이나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마스크를 2장 3장씩 겹쳐 쓰는 것도 모자라 방독면을 쓰거나 무균실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그때 백신 접종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우주복 같은 무균실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보다 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들이 가지는 안전에 대한 우려나 개인적 신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보다 공공의 안전을 반하는(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결정에 대한 비난과 멸시가 더 많았다. 그들은 어차피 백신 인증 큐알코드가 없어 식당도 비행기도 타지 못하는데도 대중들의 신변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사회의 악 취급을 받았다. 나는 그들이 백신을 맞지 않았다거나 맞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 세상이 백신을 기다렸고, 한 시라도 빨리 받고 싶어 난리인 시국에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이유야 어찌 됐건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들이 지구(地球)적 재앙에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신념에 놀랐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나도 그들을 이해한 건 아니었다. 3차였던가 4차였던가 하여간 맞으란 대로 꼬박꼬박 성실하게 팔뚝을 갖다 바친 나는 대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채 울타리 너머 띄엄띄엄 홀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안락하게 비난했을 뿐이었다.
소수란 그런 것이었다. 소수라서 틀리다는 평가를 받는 것인지, 애초에 틀렸기에 소수 밖에 못 된 것인지,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소수는 존중보다는 손가락질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도 되고 안 되고의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그것이 바로 소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수에 속한 사람들은 더 우세한 편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안쓰럽고 안타깝게 여기며 동정할 권리를 자동으로 획득한다.
나는 살면서 주류에 속해 본 적이 별로 없다. 한 번 본 건 복사하듯 외우는 능력 때문에 지나치게 공부를 잘했고, 어머니 아버지의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비현실적으로 쟐 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으며 어딜 가나 밝은 성격으로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에 다수에 속하고 싶었으니 나는 결코 주류에 속할 수가 없었....... 다고 고 말할 수 있다면 재수 없다고 욕을 먹겠지만 나는 욕을 먹어도 좋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내 평생의 바람이었던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친 척하고 입 밖, 아니 글자 밖으로 한 번 꺼내 본 것이고 내가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특출 나서가 절대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러니까 '사춘기'라는 말이 애초에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나는 특별하고 싶은 만큼 나의 '어정쩡함'이 괴로웠다. 짜릿할 만큼 명석한 천재가 아니면 시원하게 비행 청소년이라도 되어볼 걸, 피곤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지 못할 거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맞서 반항이라도 해볼 걸, 어차피 성격이 좋은 것으로 사랑받지 못할 거면 스트레스라도 받지 말고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볼걸 그랬다. 특별하고 싶었던 나는 자라서 그냥 특이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행사가 끝나고 차 한 잔이나 식사 한 끼를 사람들과 함께 하러 가는 친목 활동을 너무 싫어한다. 모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 주제를 떠올리려 애쓰는 것도 싫고 질문을 받았을 때 사회적으로 가장 적절한 대답으로 다듬는 것도 피곤하다. 굳이 그런 의도적인 정신활동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되는 사람들도 있던데 경험 상, 내 경우는 사전 필터링 없이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경우, 현장의 분위기는 싸해지고 일주일 내에 나는 왕따가 되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3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 난데없이 도발적인 건의나 혹은 썰렁한 질문을 한다든지 하는 돌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너무 띄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갑자기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미친놈...... 한 번도 나한테 붙일 생각을 못했던 단어인데 방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 좀 미친놈인가 싶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미친놈이 맞는 것 같다. 라면과 함께 폭식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퉁퉁 붓고 유난히 못생겼을 게 분명한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아 화장실 세면대 위에 붙어있는 거울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치는 것처럼 '미친놈'은 내게 평생 동안 외면하고 싶은 단어였던 것 같다.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핫템을 모르니 공구(공동구매)나 대화에 낄 수 없었고, 친구나 지인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니(만인이 추천하는 한인 교회를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가 친구 만들기에 소홀히 했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 캐나다에 온 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방인 같다. 삼십 대를 다 지나는 길목에서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별 관심 없는 나는 어딜 가나 비주류, 소수자, 주변인, 이방인, 외계인이 된다. '결혼 안 해?' '저는 지금이 좋아요', '연애는?' '그럴 에너지가 없어요' '하고 싶지도 않고?' '딱히.......' 대화가 이쯤 되면 나는 정말 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오죽하면 그냥 관심이 있는 척해서 추가 질문을 피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나를 구하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예전의 나는 제발 둘 중에 하나는 이뤘으면 했다. 내가 평범한 미친놈임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되어 버리든가...... 이젠 그냥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포기하지 못한 평범한 미친놈'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걸. 사실 아무도 내가 가진 열망이 무엇인지, 나를 어떻게 여기고 또 받아들이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므로 이래나 저래나 큰 의미는 없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대중이나 다수, 주류에 속하고 싶은 걸까?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는 다수 쪽이 되기보다, 이유 때문에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나는 어쩌면 주류에서 벗어난 나의 특이점을 애틋하게 보는지도 모른다. 사는데 결코 편리하지 않는 미친놈이지만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을 나는 충분히 애정한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지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내가 가진 방법 중 하나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