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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덴테', 넌 타이밍을 알 텐데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24화

by 황서영





이십 대 때, 탄력적인 피부도 설익은 마음도 '알 덴테' 같았던 그 시절, 나는 여기저기 들어오는 소개팅 제의를 마른 파스타 면이 끓는 물을 흡수하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받아들였다. 회사에 출근하면 컴퓨터 모니터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회사 선배들의 지인 중 누군가일 게 분명한 카톡 아이디였다. 동기들은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내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고개를 까딱하며 눈을 까뒤집었는데 그들의 고개가 까딱한 방향을 따라가 보면 싱글인 여자 과정님들의 책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 어쩌라고' 싶지만 그때는 비판적인 사고와 자주적인 결단을 내릴 만큼 용기도 강단도 없었다. 가스라이팅의 파도에 휩쓸린 나는 소중한 주말을 반납하며,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날아온 카톡에 찍힌 좌표의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느라 부표처럼 부유했었다. 요즘 아이들(?)은 소개팅 리스크 관리를 위해 식당에서 만나는 대신 카페에서 만난다고 하던데 라테(나 때)만 해도 소개팅은 무조건 식당이었다. 적어도 밥 한 끼는 같이 먹는 성의를 들여야 소개팅 상대에게도 소개팅을 주선해 준 사람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식당을 정하기 먼저 의견을 물어오는 배려 깊은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예약하려고 하는데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메시지가 오면, '이왕 하는 외식 맛있는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어 고민해 본다. 세상에는, 특히 한국에는 맛있는 음식은 차고 넘치게 많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첫 째 감자탕? 뼈에 붙은 고기가 맛있는 법인데 초면에 가락을 쭉쭉 빨며 뼈를 발라먹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좀 그렇다. 둘째 소곱창, 돼지막창은? 고기는 뭐니 뭐니 해도 구워야 제맛인데 구이집은 대게 시끌벅적한 분위기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원활한 대화가 힘들다. 셋째 활어회! 1일 1회도 가능할 만큼 활어회 킬러인 나는 회라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횟집은 대부분 눈 부시게 새하얀 형광등 조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에 자주 출연하는 한 뮤지션이 말하길 '형광등 아래에서는 사랑은커녕 우정도 안 생긴다'라고 했다). 넷째 떡볶이? 나의 올타임 소울 푸드 떡볶이는 언제나 대환영이지만 고급화된 떡볶이 보다 고등학교 앞 허름한(꼭 허름해야 맛도 기분도 난다) 분식점에서 파는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소개팅을 할 장소로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그렇다. 그렇다면 스테이크? 분위기 좋고 조용하고 우아하게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이 십 대의 주머니 사정에 치명적이므로 아예 예선 탈락이다. 그 모든 단점을 적당히 피하는 교집합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소개팅에 '적당한' 메뉴가 바로, 바로, 바로 파스타였다. 몇몇 물어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묻지도 않고 보내오는 만남의 장소 열 중 아홉이 파스타 집이었고 내 남은 평생,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다양한 변화와 해석을 통해 새로운 요리로 거듭나고 있는, 이탈리아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대표 요리를 다시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질리게 됐다. 정말 그 후 십 년 간 파스타를 (찾아) 먹지 않았다.



그러다 스파게티의 매력을 알게 된 건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다. 그건 순전히 파스타의 식감에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음식 맛도 물론 중요한 요소지만, 음식을 식기로 집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손의 감각, 혀 위에 올라간 음식물이 가져다주는 촉각적 감각도 '맛있는 경험'의 중요한 요소다. 탄수화물도, 탄수화물이 뱉어내는 포도당도 크게 즐기지 않는 내가 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롯이 먹는 재미와 식감 때문이다. 포크나 젓가락에 면을 돌돌 말아 올린 후 입술을 거쳐 혀 위에 올린다. 식기에 미처 올리지 못한 면발의 꼬리까지 들숨과 함께 빨아들이는 순간 입술의 얇은 피부층 아래 촘촘히 분포한 신경은 매끈하고 탄력적인 면발의 표면을 감각한다. 입 안으로 입성한 면들이 혀 위에 무사히 안착하면 미뢰와 기계 수용체는 맛과 촉각을 통해 면발이 치아에 의해 2등분 되고 4등분 되고 또 8등분이 과정을 즐긴다. 이 모든 과정은 파스타의 면이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에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은 스파게티나 링귀니, 그리고 페투치네가 되는 모순적이고 까다로운 식성을 가지게 됐다. (길쭉한 면의 형태가 아닌 파스타는 탄수화물을 크게 즐기지 않는 내게 먹을 이유가 없는 음식이다)



나는 입맛이 꽤 너그러운 편이라 내 기준보다 짠 음식, 좀 밍밍한 음식, 너무 매운 음식, 깊은 맛이 부족한 음식까지 내게 주어진 1인분(물론 내 평소 양에 맞는 1인분이어야 한다)을 끝내는 데 큰 불편함이 없다. 곰팡이가 폈다거나 음식의 질감이 달라졌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유통기한이 좀 지났거나 냉장고에 넣어둔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나는 음식도 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비위와 무신경함을 가졌다. 엄연히 따지만 유통기한은 유통기한일 뿐 식용기간과는 엄연히 다른데 대체로 사람들은 너무 좀 예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사회적으로는 나도 유통기한이 넘으면 폐기처분 하는 사람으로 프레임 씌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음식에 전혀 까다롭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참지 못하는 음식은 불은 면 요리다. 특히 식감으로 먹는 파스타가 불은 건 도저히 수용이 안된다. 여기서 수용이라 함은 폐기하지 않고 내 혀에 받아들인다는 뜻인데 불은 면은 절대 타협이 안된다. 그런데 그게 만약 내가 한 음식이라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진다. 싫은 마음이 요리가 아니라 나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시킨 스파게티가 불어있다면 팁을 짜게 주는 것 정도로(캐나다에는 팁 문화가 여전히 있다) 소심하게 복수(?)하고 말겠으나 내 실수로 요리를 망쳤다면 당장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불은 면과 함께 하수구에 처넣고 싶어진다. 시간이 모자란 게 아니라 시간을 더 씀으로 인해 망친 것. 마음을 덜 쓴 게 아니라 마음을 지나치게 써서 망친 관계. 덜 익은 것을 깨달았을 땐 다시 불에 올려 더 익히면 되고, 마음을 못 써서 미안할 땐 용서를 구하고 더 잘하면 될 텐데 너무 익은 면과 지나치게 선을 넘은 열정은 되돌릴 수가 없어 결국 슬픈 것이 되고 만다. 식감이 완전히 뭉그러진 퉁퉁 불은 스파게티를 씹을 때면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교훈적이기보다 슬픈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짜게 된 볶음 요리는 물을 부어 찌개로 만들고, 실수로 간장 대신 쯔유(달달한 간장)를 넣어 망친 국은 무를 넣고 졸여 조림 반찬으로 만들면 된다. 웬만한 실수는 어떻게든 재조리를 해서 버리진 않아도 될 정도만큼 재생시킬 수 있지만 불은 면 요리를 구제할 방법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망쳐버린 면요리가 담긴 그릇이 개수대 옆 조리대 위에 놓여있다. 나는 먹지도 버리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괜히 오버하는 바람에 그르친 과거의 일들과 관계들이 불어버린 면과 함께 질서 없이 엉켜 있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실패한 요리도, 불발된 소개팅도, 부유하던 어린 날도 모두 나를 위한 적당한 '알 덴테'를 찾아가는 필요한 과정이었다며 미화하기에는 불어 터진 스파게티 앞에서 멍해 있는 시간이 여전히 너무 길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덜 익히는 쪽을 택한다. 씹어 삼키는 데 크게 문제가 없는 정도로 익었다고 판단되면 즉시 가스불을 끄고 접시에 담아낸다. 겉만 겨우 익은 상태라 씹다 보면 면 안 쪽은 생 밀가루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게 낫다고 여긴다.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가 습관이 됐다. 좀 덜 익은 것 같은 약간 아쉬운 상태, 그때 딱 가스불을 끄면 최소한 식기로 집어 올리기도 전에 뚝뚝 끊어져 버리는 회복불가능한 지경은 면할 수 있다. 게다가 한참 전에 끈 가스불의 열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음식에 남아서 그 잔열로 먹는 동안 더 익기도 하니 여러모로 낫다는 마음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는 일도, 그러다 억지로 씹어 삼키는 일도 이젠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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