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28화
앞으로 내 두 시간은 블랙홀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걸 알지만 흰색 삼각형이 그려진 빨간 직사각형 위로 손가락이 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후회하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가던 손가락이 멈칫한다. 하지만 살짝 귀엽게 둥글린 모서리는 '난 널 해치지 않아' 하고 속삭이고, 흰색과 빨간색의 단순한 디자인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잠깐 놀다 가는 거지' 하고 나를 부추긴다. 3시간을 3분처럼 사라지게 만드는 요물. 어제 분명히 지웠는데 오늘도 메인 화면 손가락이 닿는 가장 편리한 위치에 있는 그것.
유튜브는 영리하고 영악하고 요망하다. 내가 클릭하지 않고는 못 배길 콘텐츠를 화면 가득 펼쳐 놓는다. 하나의 영상을 클릭하려 손가락을 뻗는데, 가는 길목에서 이미 다른 영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결국 클릭하는 건 또 다른 영상이다. 이건 마치, 전품목 88퍼센트 세일을 외치는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12개쯤 발견했지만, 한 번에 하나씩만 탈의실에 들고 갈 수 있는 규정 때문에 마음이 동동대는 기분과 닮았다.
썸네일 제목들은 또 어쩜 그렇게 잘 뽑는지, 클릭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알고리즘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 같다. 유기체 같아서 시대에 따라 변한다. 10년 전쯤엔 화려하고 잘 나가고 멋진,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영상이 선택받았다. 고급 멘션, 스포츠 카, 명품 슈트와 액세서리 등 쉽게 볼 수 없는 생경한 라이프 스타일과 희귀한 아이템들을 구경하며 사람들은 호기심과 동경을 느꼈다. 그러다 한 5년 전쯤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 성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의 도전에 대중들은 '좋아요'와 구독을 아끼지 않았다. 프로세스 이코노미가 한창 붐을 일으킨 때였다. 시작은 초라하지만 예상치 못한 걸림돌과 역경을 이겨내며 작은 성취를 드래곤볼처럼 모아가는 사람들의 눈물겨운(눈물 겨울 수록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았다) 끈기를 보며 응원을 보내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유튜브는 새로운 트렌트, 적어도 내 홈화면에는 새로운 트렌드가 찾아왔다.
외톨이, 집순이, 노처녀, 노총각, 파혼, 이혼, 졸혼, 미혼모, 독신, 혼자, 고독, 생활기초수급, 고시원, 반지하, 단칸방, 사업실패, 왕따, 도피, 대인기피증,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 실패, 빈털터리...... 따위의 키워드가 홈화면에 자주 보인다. 홈화면을 채우는 유튜브 썸네일 분위기도 변했다. 창문이 없는 작은 방 안에서 꽃분홍 극세사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나 곰팡이가 곱게 핀 반지하 방의 벽지, 간장계란밥과 나란히 놓인 초록색 소주병...... 소박하고 친근감 느껴지는 배경에, 궁서체나 명조체의 검은색 글씨, 그리고 노란색 테두리를 한 타이틀을 단,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썸네일이다. 타이틀 내용도 썸네일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안타깝거나 안쓰럽거나 초라하거나 우울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비참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검색이나 반응 데이터를 통해 사용자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파악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키워드들로 검색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 홈화면에 이런 콘텐츠가 뜨는 걸까. 처음 보는 타입의 영상들을 보며 3시간을 3분처럼 쓰는 요즘의 나를 보면 알고리즘은 생각보다 똑똑한지 모른다. 직접적으로는 아니어도 내가 소비하는 콘텐츠나 쇼핑 이력 같은 데이터를 통해 나를 파악하기라도 한 걸까. 이 정도면 데이터분석을 넘어 독심술 수준이다. 친구보다,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는 어쩌면 유튜브 알고리즘일지 모른다. 어디까지 나를 파악하고 있는 걸까, 좀 섬뜩하다. 12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심리상담을 받아온 상담 선생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물론 심리 상담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은 일들이 있지 않나.)
유튜브 내 홈화면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내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질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기까지 한 상황이나 처지를 누군가는 드러내고 보여줄 마음을 최초로 먹었을 테고, 그걸 또 누군가는 클릭하고 시청하고 좋아요를 눌렀으며 구독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공감과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고 슈퍼 땡스(Super Thanks)로 후원까지 한다. 그렇게 대중들의 반응을 얻은 콘텐츠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더 많은 사람들의 홈화면에 노출되었고 결국 나의 홈화면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나같이 내 이야기 같고 내 친구(?) 같아 하이파이브를 하는 마음으로 영상을 클릭하러 마우스에 손을 올리다가 계획에 없던 욕이 튀어나올 만큼 깜짝 놀란다. 조회수는 수 십만이 넘고, 구독자는 백만이 넘는 것도 있다. 이거 뭐지?!......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영상을 보고 싶던 마음은 어느새 '도대체 무슨 얘길 하길래' 라며 팔짱 낀 심정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된다.
아침에 출근을 하거나 학교로 등교를 할 때, 그러니까 아침의 기운으로 파이팅이 넘칠 때는 미국 주식 투자나 인문학 강의, 자기 계발서적 소개 같은 영상을 챙겨보려 노력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백수 노처녀 비 오는 날 편의점 혼술', '도피 워홀러 일주일 만에 또 해고', '결혼식 한 달 전 파혼한 여자의 브이로그', '대인기피증 공사판 노동자 고시원 살이', '삼십 대 백수 10만 원으로 한 달 버티기', '호주 외노자 싱글맘 생존기' 따위에 더 손이 많이 간다. 솔직히 나는 내가 이런 종류의 영상들로 내 재생목록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좀...... 그랬다. 속옷 사이즈? 공유할 수 있다. 까짓것 속옷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유튜브 계정은 공유할 수 없다. 차라리 내복바람으로 길거리에 나가 발레를 추지. 내가 보는 영상 자체가 창피하다기보다 내가 그런 영상을 찾게 되는 이유에 죄책감이 들었다고 하는 게 좀 더 적확하겠다. 세상이 붙인 부정적인 꼬리표를 이용한 썸네일이나 태그를 달아 어그로를 끄는 그들의 패기가 부러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세상의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이는 인플루언서들의 빛나는 명품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듯, 유튜브 브이로그 영상 속 그들의 고단한 한 잔도 삶의 일면일 뿐이겠지만 '나는 그래도 저 사람 처지보단 나으니까'라든지 '나는 저 사람보단 덜 절망적이니까' 하는 위안으로 삼기엔 충분했다. 나의 죄책감과 창피함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불행을 왼손에, 내 것을 오른손에 올린 후, 오른손이 조금이라도 가볍다고 느껴지면 나는 감사했고 안도했다. 10여 년 전에 SNS를 강타했던 성공 스토리가 내 것이었으면 했고, 5, 6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프로세스 이코노미의 주인공이 또 나였으면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요즘 내 홈화면을 채우고 있는 유튜버들의 당당한 용기와 담담한 인정의 미덕이 가장 부럽다. 나도 용기를 갖고 나 스스로를 인정할 수 좋겠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말했다.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할 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쓰는 이 글은 그 진정한 자유를 조금이라도 얻고자 하는 바람으로 쓴 발버둥의 고백이다. 그리고 나는 죄책감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내가 글을 통해 세상에 발행하는 나의 지질함을 보고 누군가가 위안과 안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단순히 공감을 한 것이든, 아니면 상대적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든 어쨌든 꽤 뿌듯할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