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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1. 2021

인공수정이라는 치트키

남편, Y 이야기 - 인공수정


   지난번 자궁외임신을 종결시키기 위해 맞았던 MTX 주사의 부작용 우려 때문에 우리는 3개월간은 임신 시도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미 초조해진 아내를 고려하면 3개월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를 해가며 새로이 시도하게 될 ‘인공수정’에 대비했다. 인공수정은 정액을 특수처리하여 운동성을 획기적으로 개선 시킨 후에 자궁에 주입하는 시술이라고 했다.

   불후의 인기 게임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적의 본진에 아군의 핵심부대를 드랍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까? 먼저 진행한 산전검사에서 내 안의 소중한 정자 부대의 운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운동성 확실히 개선 시켜준다는 인공수정은 내게 꽤 솔깃한 시도로 들렸다.




   인공수정에서 남편이 할 일은 산전검사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원치 않은 곳, 원치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정액을 채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오후 반차를 쓰고 나란히 M병원으로 들어간 아내와 나는 접수, 수납 후 각자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다. 물론 썩 내키는 경험은 아니었지만, 꼴에 한 번 경험해봤다는 것이 나를 덜 긴장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M병원의 특수처리기술이라는 믿을 구석도 있었다.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긍정의 멘트를 중얼거리며 나는 정액 채취실로 향했다.


   인공수정에서 정액채취는 산전검사와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원 검증 절차가 훨씬 꼼꼼하다는 점이었다. 인공수정 동의서를 작성한 뒤, 생애 처음으로 손등 혈관 등록 절차를 거쳤다. 특수한 기계에 손등을 가져다 대고 혈관을 스캔하는데, 기계에서 손등 혈관의 패턴을 인식해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중간에서 다른 사람과 정자, 난자가 바뀌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겠지?’ 하는 찝찝한 생각이 싹 사라지게끔 M병원에서는 정액채취실에 들어가기 전에 본인과 배우자 이름이 검체 용기에 제대로 기재되어있는지 여러 번 확인하며 철저하게 본인확인 절차를 거쳤다.


   채취한 정액을 담은 검체 용기는 사전에 안내받은 공간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곳에 용기를 두고 벨을 누르면 안에 계신 연구원분이 창문을 통해 검체 용기를 가져가 특수처리 등 절차를 진행한다. 검체 용기를 직접 연구원이나 간호사에게 전달했다면 민망했을 텐데 채취실을 나오면서 사람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다행이었다. 채취가 끝난 뒤에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려는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대기실에서 잠시 대기 후 채취한 정자가 인공수정에 쓸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5분에서 10분쯤 뒤 “Y님, 인공수정 가능하세요.”라는 확인 문구가 떨어지면 이제 공식적인 남편의 역할은 끝이다. 간혹 업무가 바쁜 분들은 여기까지 과정을 거친 뒤 바로 일을 보러 가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진료를 끝내고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만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의 정자 부대를 슈퍼정자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0분에서 1시간. 병원 내부의 답답한 분위기를 피해 우리는 병원 밖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 마시고 늦지 않게 병원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간호사분이 아내를 부르고 아내는 인공수정실로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이번엔 제발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며 속으로 기도했다. 약 30분이 지났을까 아내는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어땠어?”

무슨 심각한 얘기라도 할 셈인지 아내는 대답 대신 나를 병원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리둥절한 내게 아내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정자 처리(인공수정) 결과지라고 적힌 그 종이에는 M병원표 약발을 제대로 받은 정자들의 숫자, 운동성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최종 등급도 상, 중, 하로 나눠서 기재되는 것 같았다. 하단에 적힌 ‘상’이라는 글자를 보니, 이유 모르게 뿌듯한 느낌이 들며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갔다.


심각한 상황에도 나를 웃게 만들었던 인공수정 시술결과지. '상'이라는 글자는 나를 한시름 놓이게 했다.


‘역시 나는 조금만 보조해주면 괜찮군! 하하하’


   그날 집으로 가는 길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고,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싱그러운 연두색 새잎들이 피어 있었다. 날이 좋아서인지, 정액검사 결과지의 ‘상’이라는 글자를 보아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술에 대한 느낌이 좋아서인지 ‘이번에 임신이 되면 태명은 연두라고 지어야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녁 식사로는 착상에 좋아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 후에 많이들 먹는다는 추어탕을 먹기로 했다. 나는 원래 추어탕을 싫어했다. 추어탕 집에 가면 추어탕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돈가스를 파는 경우가 있는데, 추어탕 집에서 돈가스를 시키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아내가 착상을 위해 추어탕을 먹자는데, 나만 돈가스를 시킬 수는 없는 법. 처음에는 국물만 조금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국물이 진하고 구수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버렸다. 그날부터 우리는 거의 3일에 한번 꼴로 추어탕을 꾸준히 먹었다.


집에서 병원까지 걸어가서 병원 벽에 손바닥을 '찜'하고 기도했다. 여기가 기도 명소는 아니지만, 누구든 내 기도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장소는 상관없었따.


   그리고 착상에 산책이 좋다는 얘기에 듣고 우리는 결과를 기다리는 2주 동안 집에서 왕복 1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M병원까지 자주 다녀왔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서는 병원 벽에 아내와 내 손을 함께 놓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이전과 바뀌었다. 최근 자궁외임신 경험으로, 임신에 대한 설레임이 아니라 두려움도 커졌기에, 예전 같았으면 ‘제발 임신이 되면 좋겠어요.’라고 빌었을텐데 이제는 ‘제발 우리B 아프지 않게 해주시고 고생 좀 이제 그만하게 해주세요’로 기도 내용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은 이번에도 통하지 않았다.

‘괜찮아. 그래도 이번엔 처음으로 과배란 유도하는 새로운 방법을 써보니까 그땐 더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

‘괜찮아. 이번에는 약이 아니라 주사로 과배란을 해서 더 가능성이 높아질거야.’

이후 2번 더 과배란 유도 방식으로 인공수정을 해보았지만 인공수정이라는 치트키는 우리 부부에게 통하지 않았다. ‘괜찮아. 잘 될거야.’라는 마법의 메시지는 점점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고, 그에 반해 ‘괜찮아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우리 안의 간절함만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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