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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3. 2021

난임병원 끝판왕, 시험관 시술로 레벨업!

아내, B 이야기 - 시험관 시술


    학교에 가면 학년이 있고, 태권도에는 띠가 있고, 회사에 가면 직급이 있는 것처럼 난임병원에도 암묵적으로 나뉘는 레벨이 있다.      


레벨1. - 약도, 주사도 쓰지 않고 초음파를 보며 임신을 시도하는 단계
레벨2. - 약을 쓰면서 임신을 시도하는 인공수정 단계
레벨3. – 약도 쓰고 주사도 쓰면서 임신을 시도하는 시험관 시술 단계     
난임병원의 마지막 레벨. 그린띠로 구분된다.


    물론 같은 레벨 안에서도 N 차수에 접어들수록 염색체 검사, 자궁 내시경, 습관성 유산검사 등 다양한 검사가 추가되고 배란 단계에서만 맞던 주사를 배아 이식 이후에도 지속해서 맞는 등의 고행이 추가되긴 하지만 대략 나누자면 이렇게 3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워낙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 터라 3단계로 레벨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M병원 2년 차에 나는 결국 미루고 미루던 최고 단계로 진입하고야 말았다. 이제 과배란 주사도, 수면 마취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 아직 해볼 수 있는 게 있으면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니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이 다가오자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비장한 마음으로 시험관 시술을 위한 예약을 잡았다. 시험관 시술에 들어가겠다고 말하자 의사 선생님께서는 인공수정 단계에서 AMH 수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시험관 시술에 들어가면 AMH 수치가 임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시술 전 유의사항, 동의서 항목도 인공수정보다 몇 배는 늘어났고 부작용도 더 많은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빈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부작용에 관해 설명해주셨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어쩐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늘 긍정적으로 얘기해주시던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부작용이니, AMH니 부정적인 얘기들을 들으니 억지로 끌어모았던 자신감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불안과 무관하게 시험관 시술은 인공수정보다 과정도 훨씬 복잡했고 내가 챙겨야 할 것도 많아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일주일에 1~2번 병원을 방문해서 초음파로 난포의 크기를 확인했고 그에 따라 과배란 주사를 처방받아 매일 같은 시간에 배에 주사를 맞았다. 훌륭한 장수에게 상처는 훈장이 되듯 나는 배에 난 멍 자국을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멍 자국만큼이나 뱃속에서 난포도 무럭무럭 자라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채취 직전 살핀 초음파에서 발견된 난포는 1개에서 3개뿐. 채취 날이 다가올수록 부정적인 생각은 짙어졌고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대망의 난자 채취 날이 다가왔다. 난자채취는 인공수정보다 시간도 길어지고 채취 과정에서 움직이면 다칠 수 있으므로 대부분은 수면 마취를 한 채 진행된다. M병원 수술실로부터 ‘전날 저녁부터 금식해야 하고, 화장은 금지, 손발톱에 매니큐어도 칠하면 안 된다.’는 전화를 받고 난 뒤 나의 긴장은 최고조로 올라왔다. 저혈압으로 위내시경을 할 때 마취에서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한 이력이 있어서 ‘아기도 못 안아보고 혹시나 영영 못 깨어나면 어쩌나’ 하는 철없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우리의 앞길에 핑크빛 과정은 끝났다는 듯 인공수정에서는 핑크색이던 팔찌의 색깔도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접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손을 잡고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던 남편에게 안녕을 고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M병원의 채취실로 옮겼다.

      

    채취실 내부는 가운데 간호사 공간을 사이에 두고 12개의 커튼이 쳐진 간이침대가 빙 둘러져 있었다. 나는 5번 침대로 안내받은 뒤 하의 탈의 후 가운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뒤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서 속사포처럼 유의사항과 앞으로의 진행 과정에 대해 말해주셨다. 나의 한쪽 팔에는 수액용 주삿바늘이 꽂혔고, 한쪽 엉덩이에는 항생제 주사가 놓였다. 내 순서가 되면 불러줄 테니 편하게 쉬고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내 침대의 커튼이 다시 닫혔다. 춥지는 않았지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두툼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겼다. ‘얼마나 아플까. 걸어서 나올 수는 있을까. 마취는 문제없겠지…….’ 별의별 생각 중에 어느덧 나의 채취 순서가 돌아왔다.     


채취실에 붙은 아기 발사진을 찍어오진 못했지만, 최대한 비슷한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해놓고 아기를 기다렸다. 이 사진은 내게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다.


    링거를 꽂은 채 나는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채취실로 이동했다. 코로나로 인해 쓰고 있던 덴탈 마스크 위로 산소마스크가 덧씌워졌고 “B님 긴장 푸시고요. 자, 마취 들어갑니다” 간호사 선생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취 의자가 놓인 천장 위에는 ‘아기의 발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엄마의 손’ 사진이 붙어있었다. 남편의 위로도, 회복실 이불도 풀어주지 못했던 긴장이 이름 모를 아기의 작은 발을 보자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이 든 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다시 회복실 위 침대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 선생님의 소리에 눈을 떴다. 아랫배로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이 채취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혈압 체크, 항생제 수액을 맞은 뒤 나는 난자채취 결과지를 받아들고 채취실에서 나왔다.

     

    반전은 없었다. 내 몸에서 채취된 난자의 수는 3개였다.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이긴 했지만 3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누가 짓밟고 가기라도 한 듯 아랫배 통증이 슬슬 올라왔고 그간의 진료금액과는 차원이 다르게 높은 진료비도 내 신경을 긁었다. '앞으로 몇 번의 시도를 더 해야 할까.' 벌써부터 패배감이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다음날 오후 4시가 되자 휴대폰 팝업 알람이 떴다. M병원 플리케이션의 알람이었다. 인공수정 때는 받아보지 못했던 알람이라 놀라서 팝업을 확인해보니 수정란 숫자가 보였다. ‘수정란 수 2’ 곧이어 채취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B님, M병원이에요. 수정란 2개 나왔구요. 이식은 내일 진행할 거예요”     


    M병원에서 처음으로 받은 낭보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이번 차수는 이식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각오했었는데 2개가 배아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전달받자 그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식은 채취 때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함께 가겠다는 남편을 회사로 보내고 혼자 M병원을 찾았다. 채취 날과 달리 이식 날은 혼자 갔는데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멀쩡한 정신으로 의자에 앉았다. 의자 옆 모니터를 통해 나는 내 몸에 이식될 ‘배아’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B님, 화면 보이시죠? 배아 2개 성장했구요. 둘다 중급 배아로 이식하기 좋은 상태에요”     

곧이어 이식이 진행되었다. 지난번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던 천장 위 아기의 통통한 발을 보며 배아들이 부디 좋은 자리에 잘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식이 끝난 뒤 나는 배아 이식 결과지와 함께 내 몸에 이식된 배아들의 사진을 받았다. ‘내가 왜 시험관까지 해야 하냐’고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상황이 이 사진 하나로 달리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아기를 배아단계에서부터 사랑할 기회를 부여받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남편은 배아들에게 ‘몽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우리 부부는 그때부터 ‘몽글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결과 확인까지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에는 버틸 수 있었다. 시험관 아기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나는 다시 몽글이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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