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산티아고 - 피네스테레
산티아고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피네스테레에 버스를 타고 가보려고 한다.
피네스테레(Fisterra)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확장 루트로 알려져 있다. 거리는 산티아고부터 90km 정도이며 도보로 3~5일 정도 소요된다.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걷고 나서, 그 여운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다.
새벽의 산티아고.
구름 낀 하늘에 마을의 노란 불빛이 으스스하지만 오묘한 기분을 준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가서 젖은 운동화 말고 쓰레빠 신고 갈 예정이다.
버스 타러 가기 전 산티아고 대성당에 먼저 들러보려고 한다.
새벽감성 느끼러
벌써부터 출근하시는 분들도 보인다.
상점 디스플레이 공간은 불빛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나 보다.
하늘엔 구름이 있지만 별들도 중간중간 보이고
성당 앞에 있는 팔라시오 데 라호이(Palacio de Raxoi)
지금은 정부 건물로 사용된다고 한다.
아주 고요하며 잔잔하다.
시끌벅적한 순례자들이 가득 찬 오후와 달리 이른 새벽엔 혼자서 이 성당을 느끼기 아주 좋았다.
성당 앞에 나 홀로 있었던 순간이 잠깐 있었는데 이 세상에 나만 남겨진 그런 기분도 들었다.
이 정원도 어제는 사람이 붐볐었는데, 역시 사람 없는 새벽이 좋다.
산티아고 역에 도착했다.
9시 버스를 타고 갈 예정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버스에 타자마자 배고파서 빵을 먹었다.
출발하니 갑자기 소나기도 내렸다가
그쳤다가- 아주 오락가락한다.
34일 만에 교통수단을 타니 느낌이 이상하다.
세상이 많이 발전한 기분이다.
낯설다.
무엇인가 꾸준히 행동하며 익숙해진 감각은 익숙한 경험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는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물이 보이는 풍경에 시원함이 느껴졌다.
주택들도 다 같지 않고 개성 있게 지어져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엉덩이가 아플 무렵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 풍경
등대까지는 버스 내린 지점으로부터 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천천히 바다구경하며 올라갔다.
이 거리 비석이 산티아고에서 0으로 끝나지 않고 갑자기 이곳으로 점프한다.
피네스테레가 순례의 진짜 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이곳을 지구의 끝이라 믿었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삶과 신앙의 끝자락이라 여겼다.
그래서 피네스테레는 정신적인 순례의 완전한 종결점이 되었다. 0km 비석은 물리적 거리가 아닌, 순례의 본질적인 마무리를 의미한다.
이제 곧 0km 비석이 나온다.
도착했다.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0km 비석
피네스테레 등대(Faro de Fisterra)
이 등대는 대서양을 향해 뻗은 피네스테레 곶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나는 사잇길을 통해 바다 가까이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돌계단이라 크록스를 신은 나는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꽤 험하다.
바닷바람이 매우 거세서 머리카락이 아주 사방으로 휘날린다.
누군가는 순례길을 함께했던 신발을 철탑 위에 걸어놓았다.
(치우기 힘들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물이 뚝 떨어졌다.
삶의 무게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조금 다른 결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말을 내게 한다.)
어릴 적 나는 해맑고 순수했으며, 약간은 천방지축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를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밝았다. 많이. 그 느낌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지만 이제 나는, 삶을 무겁고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다.
또래 친구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나는 자주 고민한다. 가끔은 그런 속마음을 친한 사람들에게 털어놓지만, 대부분은 “너 왜 그런 걸 생각해? 그냥 살아”라며 가볍게 웃고 넘긴다. 나도 같이 웃으며 넘기지만, 내 안에는 그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문다.
그래서인지 나 스스로도 내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나에게조차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이성 관계에 있어서도 무겁고 신중한 편이다. 뭔가 아직 벽이 있다. 그 벽을 넘어서게 할 만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소개팅 제안이 종종 들어오기도 하지만,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다. 사랑을 하고 있는 나를, 내가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들 속에서, 이 눈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여기선 혼자 울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일단,
살아봐야겠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글이든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갑자기 가족이 생각나서 가족에게 영상편지를 남겼다.
이 바닷가 언덕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양 무리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어떻게 먹고살까? 대단한 생존이다. 한편으론 이 자연이 다 너네 집 안방이라니 부럽다.
이제 좀만 더 있으면 감기가 들 것 같다. 몸 괜찮아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서 가야겠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집으로 피신
상큼한 요구르트와 비스킷맛 젤라토를 시켰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중
이탈리아 친구 마르티나가 만나자고 해서 저녁 먹으러 가는 중이다.
마르티나가 추천한 타파스집에 왔다.
여기, 해산물이 신선하고 정말 맛있었다.
마르티나와 마르티나 친구들 두 명도 같이 식사를 했다.
러시안샐러드라고 해서 시켜봤는데 약간 우리나라 감자샐러드 느낌이다.
치즈 + 앤초비
좀 비리지만 참을 만하다.
제일 맛있었던 관자 + 새우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들 진짜 유쾌하다.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를 축하하며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을 보냈다.
또 새우
생선을 다진 것 같은데 식감이 별로였다.
타파스는 간단한 요깃거리인데 이제 우리는 식사를 한...;;
해 들어갈 시간
마르티나와 친구들은 시내에서 더 논다고 해서 나 먼저 들어간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아름다운 석양이 보이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제 순례길을 마치려 한다.
나에게 많은 사유의 시간을 준 이 순례길 위에서의 시간은 앞으로의 삶에서, 이따금씩 다시 떠올려보며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 한 번 더 묻고, 또 고민하게 해 줄 것이다.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번 순례길을 걷고 싶다.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것.
순간순간에 감사할 줄 알며 앞으로 나아갈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그 마음을, 나는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
문득,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이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한국어에서 ‘사랑’은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뜻의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모든 것을, 생각하고 헤아린다.'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삶이 다했을 때,
내가 경험한 사랑을 정의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순례길 인사
Buen Camino ; 당신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amino de Santiago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