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리율로 Dec 06. 2021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예상치 못했던 위기, 힘겨웠던 시간들

법원의 판결은 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딸아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딸아이는 그동안 나와, 그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너무나 즐거워했었는데 우리 집에 '진짜로' 살게 된 첫날 밤새 흐느껴 울었다. 첫째 아들도 밤새 뒤척이며 그런 설리를 안아주고 토닥이며 재웠다. 


설리는 집에 오고 난 후 약 한 달 정도를 바닥만 보고 다니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상실과 분리의 아픔이 너무 큰 탓이었다. 실제로 보육원이나 위탁 가정에서 지내다가 입양된 아이들은 깊은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다. 비록 아이가 자신만을 향한 온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환경이었을지라도  보육원은 아이가 자란 집이었고 최선을 다해 돌보아준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였다. 실제로 아이들은 보육원 선생님을 엄마로 불렀고, 교대근무를 하는 선생님들 중 더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평생 사랑하고 아이가 따뜻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다짐을 하며 아이를 입양했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정든 집과 엄마에게서 강제로 분리되는 아픈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세 오빠들은 설리와 놀아주고 설리를 안아주고 서로 설리와 놀겠다며(혹은 밥을 먹겠다며, 잠을 자겠다며) 쟁탈전을 벌였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나를 극심하게 거부하는 딸아이의 모습이 내게는 너무 상처가 되었다. 


‘난 내 인생을 포기하며, 또 어른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너를 품에 안았는데, 너는 왜 나를 그렇게 거부하니?’ 


설리는 설리대로 너무 힘들어하고 나는 점점 번아웃이 되어 갔다. 


설리가 우리 가정에서 적응해가던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아이는 정말 너무너무 많이 울었고, 화를 내었고, 고집을 피웠다. 거짓말을 하고 때리고 눈치를 보았다. 아이는 나에게 분노를 표현했고 나도 아이에게 분노했다. 


아들 셋을 홀로 육아하면서도 밝음 에너지를 잃지 않던 씩씩한 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난 웃음을 잃어갔고, 입양이 아이를 더 불행하게 하는 것 같단 생각에 깊이 빠졌다. 아이들도 달라진 설리의 모습에 힘들어하였고 우리 부부는 아이의 부적응이 상대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서로를 비난했다. 

난 깊고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입양 선배인 친한 언니가 부산에서 좋은 입양 교육이 있으니 함께 받자고 했다. 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교육에 참여했다. 입양 교육은 '입양아카데미'라는 이름의 수업이었다. 


입양아카데미 교육을 통해 난 설리의 행동들 이면에 숨어있는 상실과 아픔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부분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문제 행동이 내가 싫고 입양된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분리와 버려짐에 대한 불안과 상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앎이 완전한 사랑과 이해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나는 조금 덜 분노했고, 덜 슬퍼했으며 조금씩 딸아이와의 관계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삼한사온처럼 아이 때문에 힘든 날들과 그나마 아이가 예뻐 보이고 웃음 지을 수 있는 날들이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큰아이를 입양한 많은 선배들이 아이가 보육 시설에서 지낸 시간만큼 우리 집에서 살아야 서로 가족으로 인정되고 사랑하며 살아진다고 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를 악물고 견뎌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 엄마를 만난 아이와 처음 딸을 만난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