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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Jan 14. 2023

내성적인 아이와 내성적인 어른


방학 직전에 학교 도서관에 심리학 관련 책들을 훑어보러 갔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 집어 온 책을 단 숨에 읽어버리고 나서 글을 쓰고 싶어져서 이렇게 화면을 켜보았다. 책 제목은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이고 부제로는 ‘관계 중독 세상에서 나만의 생활방식을 지키며 조용하게 사는 법’이라고 쓰여있는 책이다. 나의 초,중,고 동창들은 나를 떠올릴 때 내성적이라거나 내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런 것이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더듬지 않고 말할 수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먼저 말을 걸고 잘 웃으며 분위기를 맞출 수 있으니까. 어쩌면 외향적인 인싸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서도 말하지만 수줍은 사람과 내성적인 사람은 분명 다른 차원이고, 벤 다이어그램으로 생각하자면 교집합이 있을 뿐이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차집합에 해당하는 수줍음이 없는 내성적인 사람에 속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도 제대로 외향적인 사람보다는 수줍음이 있지만, 흔히 내성적인 사람에게 기대하는 수줍음의 수치에는 못미칠 정도의 수줍음을 지닌 사람말이다. 대부분의 심리학 연구들이 외향성에 집중되어 이루어졌고, 내향성은 외향성의 반대측에 있는 정도, 외향성의 반대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는 저자의 지적에 4년간 심리학 공부를 했던 나조차도 뜨끔했다. 점차 세상은 외향성을 더욱 좋은 성격으로 바라보고, 자기어필과 자기주장이 트렌드가 되면서부터 더욱더 외향적인 성격특질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 같다. ​


학교에서 만나는 많은 내향적인 아이들로부터 상담 중에 자신의 성격이 싫고 바꾸고 뜯어고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많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내향적인 성격도 그만의 장점이 있고 그 자체로 아름답고 예쁘고 소중한데, 나의 부분을 미워하며 보내는 시간이 참 안쓰럽고 그런 메세지를 주는 사회와 문화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나는 상담 중에 그런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길게 말해주곤 한다. “선생님도 내성적이고 소심한데, 선생님은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들어. ㅇㅇ이가 하고 싶지만 못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나라서 더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거든. 예를 들면, 지금 선생님처럼 조용하게 소수의 사람들과는 진솔하고 깊은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있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고, 조용한 곳에서 홀로 집중하며 채우는 시간을 십분 활용해서 글을 쓸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있거든. 성격을 바꾼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물론 조금 더 살아가기 쉽도록 사회적인 스킬을 늘릴 수는 있지만, 타고난 내 성격은 뜯어고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수용하고 사랑해주어야 할 부분이거든. 선생님은 상담을 통해서 ㅇㅇ이가 나의 성격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아껴주게 되기를 바래. 어떻게 생각해?”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 아이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왔는데 성격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꼴이니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상담과 검사를 통해 아이가 나의 성격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수용하고 나아가 사랑해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와 더불어 아이가 일상 속에서 수줍음과 내향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지점들에 대해서는 같이 의논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인 말과 행동을 상담 장면에서 함께 생각해보고 연습하여 상담실을 나가서도 직접 실행해볼 수 있도록 지지한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아이들은 이미 성격이 많이 형성되고 공고화되어 있어서 많은 부분을 바꾸기는 어렵기에, 무엇보다 스스로의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탐색하고 장점을 살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우선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라서 내향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자라오는 과정에서 참 많이 주목받으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지금 교사라는 자리에서도 무난하게 다른 선생님들과도 소통하고 새로운 학생들과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티나게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때로는 그렇게 애쓰며 살아온 나의 어린시절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노력에는 박수를 치지만, 그렇게 애를 써온 나의 하루하루들은 참 지치고 피곤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근간이 내성적인 사람이다. 내성적인 기본에 후천적인 노력을 더해 외향적인 스킬을 탑재해오면서 내향성과 외향성이 균형있게 고른 지금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직업을 가진 하나의 어른이 되면서 인간관계도 점차 선택적이게 되고 좁아져가는 과정에서 나는 굳이 모두와 완벽하게 잘 지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물론 적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지만) 원래 생긴대로의 성격이 많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특히 여러 학생들 앞에서 교수를 하는 선생님이라는 직업 특성상 하고 싶은 말이 많고 말을 즐겨하고 또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분들이 많기에, 그들만큼의 외향성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되려 느끼며 나라는 사람의 내향적인 성격을 보다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서툴게 마주하는 나의 내향적인 성격을 이 책에서는 보다 명료하게 표현해주는 느낌이었다. 공감되는 표현이 많아서 오늘은 인용을 길게 많이 할 예정이니 독자들은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기 바란다. :-)



생각해보면, 나는 여러 선생님들과 나누는 잡담의 시간에 취약하다. 나는 나서서 주도권을 잡고 이야기를 하며 주목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나에게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소신껏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라서 앉아서 한 마디도 안(못)할 때가 많고 그저 그들의 근황과 가십을 들을 뿐인데도 아무 이유 없이 피곤하고 기가 빨린 느낌이 든다. 주제가 빛의 속도로 바뀌고,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가십이야기가 오가고, 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해 돌아가며 이야기하다가 또 그 속의 어떤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모든 대화의 흐름을 열심히 듣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주의집중력은 최대치로 일하고 있다. 그런 빠른 흐름에서 내가 치고 틀어갈 틈을 엿보는 것은 소리없는 전쟁이며, 그래서 나는 전쟁은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저 가벼운 잡담이고 근황이야기이고 스몰토크인데, 나는 왜 흘려듣지 못하고 아무도 열심히 들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힘들게 앉아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가 많았다. 그런 시간들은 때때로 내게 우연히 어떤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잃는 에너지가 더 클 때가 많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다기 보다는 그냥 내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다. 내 성격이, 나의 뇌가.

[…] 그라임스는 내게 말했다.
“어떤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피곤함의 정도가 다르다는 걸 당신도 알 겁니다.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고 많이 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에너지를 많이 투자하지 않으려 하는 대신 많이 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대중 문학에서 외향적인 사람들로 묘사되는 사람들, 사교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돌려받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가벼운 인간관계에 만족하지 않는 우리 같은 이들은 사람들을 사귀는 데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고 더 큰 보답을 바란다. 그저 가볍게 사람들을 사귀는 것은 피곤하고 맥이 빠진다. 그런 식의 만남은 에너지를 고갈시키기만 할 뿐 새로운 에너지로 빈 우물을 채우지 못한다.
오랫동안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그런 대화는 에너지를 다시 채워주기도 한다. […]
그라임스는 내보내는 것과 되돌려 받는 것이 비례하지 않으면 불협화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한 불협화음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고.
이것은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듯하다. 내성적인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걸핏하면 “너무 진지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런 진지함 때문에 외향적인 사람들은 진이 빠질 수 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사람 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많은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진지함이 불편해질 정도로 깊이 들어가라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럴 때 그들의 에너지는 고갈된다.
에너지의 유출과 유입이 항상 같은 양으로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는 조금 하면서 많이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진을 뺀다. 그들은 감정의 뱀파이어들이다. 그리고 투자는 많이 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임에서 우리에게 다가와 고역스러울 정도로 자세하게 ‘나에 대한 모든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소피아 뎀블링, 책읽는수요일) pp. 57-59.
내성적인 사람들이 상대의 말을 듣는 걸 힘겨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심히 듣는다. 말은 우리 귀로 들어간 다음 분주하게 윙윙 돌아가는 뇌로 곧장 가서 입력되고 분석된다. 우리는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렇다. 모든 사람이 얘기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중 대부분이 그저 빈 공기일 뿐이다. 모든 사람의 얘기가 최선을 다해 들어줄 만큼 가치 있지는 않다.
상대가 입 밖으로 꺼내놓는 말과 더불어, 우리의 분주한 머릿속은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배경, 문맥 그리고 말 뒤에 숨은 동기까지도 모두 듣는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이 사람이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내게 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한다. […] 어쩌면 내 짐작이 맞을지도 모르고 틀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짐작을 했다고 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수다가 계속되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뿐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소피아 뎀블링, 책읽는수요일) pp.147-148.



나는 한두명의 선생님들과 둥글게 앉아 각자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고 차분하게 나눌 때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그 때는 나도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나의 삶의 조각보를 펼쳐놓는다. 이런 시간과 만남에서는 누구도 내가 더 많은 이목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고루 시선과 귀를 나눈다. 나는 그런 시간 속에서 채워진다. 어떻게 보면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성적이고 깊은 사람이다.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다. 물론 사회적인 노력은 늘 하지만, 생긴대로 살고 싶다. 나의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에는 모든 이들에게 차가워지고 날카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생긴대로 나의 에너지에 맞게 살아가면서 나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

우리가 무의미한 수다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진지함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내성적인 사람이 투덜거렸다. “알맹이도 없는 잡담을 듣는 게 진짜 싫어서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나는 그런 수다에 비판적이에요.” 과장하는 게 아니라, 이런 성향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도 있다. 잡담보다는 알찬 대화가 우리의 행복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한 연구에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 연구진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덜 행복한 사람들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적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장 불행한 사람과 비교했을 때 알찬 대화를 두 배 이상 하고 잡담은 3분의 1 정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물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더 행복해지는 건지 아니면 행복해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는 건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쾌활한 모습을 보여줄수록 더 많은 대화를 끌어들이는 건 맞는 듯싶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웃음기가 사라진 무서운 얼굴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런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내게 말을 걸어보라는 듯한 미소를 띠고 다니지 않을 수 있고, 규모가 큰 그룹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소규모 그룹이나 일대일 만남에서 마음이 편해지면 기분 좋게 오랜 시간 대화를 할 수 있으며 할 말도 많아진다. 진실을 말하자면, 어떤 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말이 많아진다. […]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소피아 뎀블링, 책읽는수요일) pp.80-81.​




그리고 나는 내가 꺼내어 놓은 소중한 내 삶의 이야기가 단지 가십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누군가가 나에게 나누어준 이야기를 가볍게 옮기고 다니지 않으려 한다. 오랜만에 성사된 만남 중에서도 나뿐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여전히 교류하고 인간관계를 얕고 넓게 관리하는 듯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나의 근황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팔리고 전달되는 것을 경계하고 그러한 일을 상상하면 불쾌해지곤 한다. 알고 지내는 지인은 많지만, 정말로 내가 가깝고 깊은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정된 나의 에너지를 소중하게 아껴서 잘 사용하고 싶다. 그렇기에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하고, 거절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답게 나로서 살 수가 있다. ​

나는 친구가 아주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유독 편치 않다. 군중 속에 파묻힌 느낌이 들어서다. 나는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는 게 좋다.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좋은 것이다. 이 역시 나만의 관점일 터인데, 친구가 많은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수많은 친구가 있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눈송이처럼 여길 것이다. 또 다른 외향적인 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느끼도록 빛을 비춰줄 수도 있다.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닐 때도 있고 진심일 때도 있다. 우리로서는 외향적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의 태도를 알 뿐이다.
어쨌든 내성적인 사람들과 외향적인 사람들은 사물을 보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을 한데 이어주는 잡담은 외향적인 사람들의 귀엔 음악이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의 귀에는 소음이다. 규모가 큰 모임은 외향적인 사람에게 1000명의 새로운 친구처럼 보일 테지만,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기껏해야) 시간 낭비처럼 보인다. 전화벨 소리는 외향적인 사람에게 기회처럼 들리지만,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방해로 들릴 뿐이다. 계획이 없는 저녁은 내성적인 사람에게 더없는 행복이지만,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사교의 실패다. 내성적인 사람은 휴대전화를 족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생명줄이다. 팀별 활동은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고문이지만, 외향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냥 팀별 활동일 뿐이다. (물론 개략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모든 모임을 지옥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외향적인 사람들이 조용한 저녁을 언제나 사교의 실패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소피아 뎀블링, 책읽는수요일). pp.75-76.
또한 내성적인 사람들은 매일 사람을 만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씩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므로, 며칠 연속해서 사람을 만났다면 잠시 그 일을 멈춰야 한다. 나는 며칠 동안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머릿속이 다른 사람들의 말로 꽉 찬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말들이 덜그럭거리면서 떠들어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통에 할 수만 있다면 귀 밖으로 떨어내버리고 싶다. 그런 상황이 되면, 평소엔 받아들였을 법한 초대도 거절한다. 사교의 벽에 부딪쳤을 때는 어떤 초대도 혼자 있는 것만큼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을 만나 교제하는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누구를 언제 어떻게 만날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 내성적인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만남에 귀중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정하건대, 우리는 쌀쌀맞아질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걸 쌀쌀맞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라기보다 일종의 자기 보호와 자기 조절이다.
모든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 인간관계에서 양보다 질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한계를 알고 중요한 사람과 활동을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는 걸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태도가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소피아 뎀블링, 책읽는수요일) pp.107-108.




내성적인 교사로서 내가 먼저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내성적인 아이들도 나를 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내 안의 내성적인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 그저 꼬옥 안아주며, 그동안 많이 애썼다고 토닥여주고 싶다. 내가 만나는 내성적인 아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꼭 바뀌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그저 생긴대로 나를 이해하고 나를 설명하고,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고,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성적인 사람으로 이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참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래도 수많은 내성적인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 자기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면서 나도 내성적인 어른으로서 어떤 내성적인 아이 한명에게라도 우연히 하나의 본보기와 희망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아가서는 내성적인 아이와 외향적인 아이가 서로를 이해하고 조화롭게 지내는 학교를 거쳐 내성적인 어른으로 잘 성장해서 또 내성적인 어른과 외향적인 어른이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조화롭게 지내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작지만 큰 소망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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