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학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교직을 이수한 뒤 임용고시를 봐서 합격한 전문상담교사로서 상담대학원에 대한 고민은 한 번씩은 꼭 하는 것 같다. 나역시도 그렇고, 현재 나에게 느껴지는 상담대학원은 "가야만 할 것 같은" 곳이다. "가고 싶은" 곳이라는 마음은 아직인 듯하다. 그렇지만 주변의 많은 상담선생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대학원을 준비하고 또 가기도 하고 가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상담심리사는 한국상담심리학회나 한국상담학회에서 나오는 공신력 있는 상담심리사 2급, 또는 1급 학회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문상담교사는 "교직"을 이수하고 "임용고시"를 치뤄 전문상담 교원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이 불일치에서 "상담" "교사"라는 자리는 상당히 심적 불편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인 것 같다. 왠지 "상담" 자격이 미흡한 듯한 느낌. 그리고 실제로 상담심리사가 의무적으로 거치는 수많은 개인 또는 집단 상담에서의 상담자 및 내담자 경험이나 수련감독, 공개사례발표회 등등의 경험들을 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스스로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품고 스스로를 상담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되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다른 교과 "교사"들은 이만큼 확실한 비교군이 없기에 이정도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불신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있다면 사교육계 유명강사들이려나. 상담교사와 상담심리사는 전문성이 분명히 다른 직군일까. 아니면 상담교사는 상담심리사의 애매한 아류인걸까. 이 부분을 명확히 스스로 정리해내지 못하면 상담교사로서 일하면서 일의 의미나 자부심을 찾는 것은 요원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상담대학원을 가서 상담심리사 학회자격을 따야만 나는 능력있는 상담교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전문성 있는 "상담"사가 되고 싶은 걸까, 전문성 있는 "상담"교사로서 정체성을 찾고 싶은걸까. 물론 "상담"이 전공이기에, 꾸준하고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상담교사로서의 커리어를 개척해 나아가는 데에 반드시 '상담심리사'자격이 필요할까? 그래서 반드시 업을 멈추고 일반대학원을 가서 자격을 따야 할까? 매순간 생각이 흔들린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해에 학과장님은 "학교상담"이라는 분야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고, 지금 임용되는 여러분이 이 분야를 개척해서 전문가가 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도 여전히 학교상담이라는 분야는 옛 이론으로만 점철되어 있다. 실무를 하는 현장과는 거리가 먼 이론적인 이야기들. "School Psychology" 또는 "School Counseling"이라는 과목과 전공은 아직도 부재하다. 이제 막 1학교 1상담교사를 채우려고 배치되는 와중에, 학문이 생기는 것은 더더욱 먼 미래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길을 내가 갈 수 있을까? 앞 사람들이 가지 않아 덤불과 잡초가 무성하여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길을 헤치고 나아가려면, 그만큼의 열정, 애정, 의지가 필요한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개척자보다는 성실한 팔로워인 것 같은데, "학교상담교사"로서 "학교상담"이라는 분야에 애정을 갖고 개척해가는 길을 갈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학교상담은 일반상담과는 분명 매우 다르다고 느낀다. 단지 나에게 찾아오는 자발적인 내담자를 대상으로 상담을 길게, 전문성있게 진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학교상담은 정해진 학교 정원의 학생들을 모두 관리하고 발굴하고 보살펴야 한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그들의 심리상태와 위기상황을 미리 살피고 위기에 처하기 전에 발굴하여 상담을 해보자고 설득하고 또 상담을 연결해주고 여러 기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공백없이 전문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세팅하고 관리해야 한다. 심리상담도 상담이지만, 현재 학교에 1인뿐인 상담교사는 모든 상담을 전문성있게 길게 진행할 물리적 여건이 도대체가 안된다. 학교상담실의 운영자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학교상담실장이랄까. 그래서 내가 있는 지역과 학교 근처의 연계기관과 교육청의 통합되지 않고 뿌려지는 수많은 사업들을 제대로 파악하여 가장 핏이 맞을 학생에게 각 사업과 기관을 연결하고 학교방문상담들을 세팅하는 역할이 주인 것도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일하면서 파악한 상담교사로서 필요한 능력은 "접수면접을 통해 학생들이 상담에 대한 좋은 감정과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아우라와 능력", "여러 사업들과 기관들과 협력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자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학교의 외부 이미지를 긍적적으로 만드는 능력", "학교 내 교사들과 관리자들에게 상담교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고자 한다는 진실한 마음이 향기처럼 퍼져나가게 하여 학교상담실에 대한 교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능력", "정서적으로 취약하고 마음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의 보호자가 학교상담실이 치료과 회복을 돕고자 한다는 조력자임을 느낄 수 있게 협력하며 최대한의 지원을 연결해주는 능력" 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경우, 제도와 사업과 예산과 기관은 있지만, 이 모든 혜택과 지원들이 미성년자인 학생에게 닿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일차적으로 상담교사는 있는 제도, 사업, 예산, 기관들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지원책들을 보호자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동의를 얻고 설득해야 한다. 얼핏 생각하면 보호자들이 동의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고 좋은 지원인데 왜 이를 설득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삶에 익숙해져 있을수록 왜 도움이 필요한지 느끼기 어렵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취지의 지원임에도 보호자님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때도 많고, 그럴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든다. 그러면서 나도 생각하게 된다. 상담이 만병통치약도 아닌데 상담을 제안하고 지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담도 받는 사람의 몫이 있다. 같은 상담이어도 내담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느냐에 따라 좋은 계기와 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하지만, 힘든 이야기를 억지로 꺼내면서 저항만 커지고 상담에 대한 불신만 커지는 강요가 될 때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상담지원도 학생과 보호자가 준비가 되었을 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러려면 상담지원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기간 동안 학생이 위험해지지 않을까 하는 상담교사인 나의 조급함과 불안함을 견뎌야 하고, 조심스레 살피면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기다리면서도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이의 일상을 볼 수 있는 다른 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그 아이의 동향을 살피곤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한 번 만나 상담과 상담교사에 대한 긍정적 기억과 인상을 심어주고 마음이 힘들어 학교상담실이 마침 순간 떠오르고 스스로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 살피는 이 기나긴 시간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도움도 소화할 수 있을 때 주어야 약이 된다. 사랑도 사랑받고 싶을 때 줘야지, 거부할 때 강요하면 그 또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여전히 여러가지가 고민이다. 대학원을 가는 것이 좋을지, 사비를 들여가며 계속 교육분석을 받는 것이 좋을지, 현장에서 구르고 부딪히며 지금까지처럼 아이들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을지. 이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어떤 상담교사가 되고 싶은건지. 그럼에도 1년차에 썼던 고민과 지금의 고민을 비교해보면, 아주 조금씩은 윤곽이란 것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해서 조금은 희망적이다. 계속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걸어가봐야지. 모든 길은 걸어가봐야 아는 것이니, 나의 순간순간의 고민들을 발자국 삼아 가보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어가보련다.
[1년차 상담교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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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교사란 직업에 대한 고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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