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식품’이라는 프레임

정치의 언어가 만들어낸 왜곡

by 뉴욕 산재변호사

2013년, 박근혜 정부는 ‘4대 사회악’을 규정하며 강력한 단속과 근절을 약속했다. 성폭력, 학교 폭력, 가정폭력, 그리고 불량식품 유통. 앞의 세 항목은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명확한 중대한 범죄였지만, 마지막 항목인 ‘불량식품’은 발표 당시부터 대중의 의아함과 웃음을 자아냈다. “불량식품이 왜 성폭력과 나란히 있는가?”라는 반응은 단지 국민의 정서적 반발을 넘어서, 정책 언어의 부정확성과 정치적 프레이밍 전략을 되짚게 만든다.


‘불량식품’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정서적으로 과잉된 표현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 말은 문방구 앞에서 팔던 아폴로나 테이프 과자 같은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대의 환경 속에서 소비되던 간식에 ‘사회악’이라는 극단적 낙인을 씌우는 순간, 정책은 국민과의 정서적 괴리를 낳게 된다.


이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 담론에서 언어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조직화하고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도구다. 이 점에서 우리는 프레이밍 이론(Framing Theory)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레이밍 이론은 어떤 사안이 어떤 언어, 어떤 이미지, 어떤 맥락 속에서 제시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즉, 문제를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규정한다.


‘불량식품’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프레임은 바로 이것이다. 이 표현은 식품안전의 법적·과학적 기준을 문제 삼기보다는, 정서적 혐오와 도덕적 타락의 이미지를 호출한다. ‘불량’이라는 말은 추억 속의 저렴한 과자들까지 싸잡아 비난의 대상이 되게 만들며, 동시에 복잡한 식품 유통 구조나 기업 책임 문제는 감추고 만다. 이처럼 프레임은 현실을 단순화하고, 감정을 호출하며, 특정한 정치적 방향으로 사고를 유도하는 힘을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이론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 속에 있다(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고 말했다. ‘불량식품’이라는 단어는 그 사용 방식에 따라 단지 안전 기준 미달의 식품을 넘어서 ‘사회적 병폐’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즉, 이 단어는 국민의 기억 속에 있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이미지를 끌어와, 정책적 상징으로 전용되는 순간, 그 의미와 기능이 완전히 재구성된다.


더 나아가, 이것은 정치적 기획의 문제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처럼 근절이 어렵고 복합적인 문제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단속이 쉽고 단기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불량식품’을 끼워 넣음으로써 당시 정부는 실적과 통치의 상징을 동시에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책 우선순위의 왜곡과 행정 신뢰의 손상이라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최근 중국 간쑤성 톈수이시 유치원에서 발생한 집단 납중독 사건은 식품안전의 본질이 단순히 ‘불량’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임을 보여준다. 급식 사진이 잘 나오면 원아 모집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원장의 판단 아래, 식용 금지 물감이 음식에 첨가되었고, 병원과 지방 정부는 검사 결과를 조작하거나 은폐했다. 이는 단지 ‘나쁜 음식’이 아니라, 공공책임의 붕괴이며, 구조적 위기의 증거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식품의 겉모습이 아니라, 정치·행정 시스템의 내용과 신뢰다.


이처럼 식품 문제는 결코 감성적 언어로 포장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량식품’이라는 언어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진짜 해결해야 할 구조적 위험을 외면하게 만든다. 차라리 ‘위해식품’, ‘부정식품’, ‘안전기준 미달 식품’ 같은 법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했더라면, 국민적 공감과 신뢰를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는 언어로 작동한다. 그 언어가 정교하지 않으면 정치는 곧 선동이 되고, 정책은 곧 쇼가 된다. 박근혜 정부의 ‘불량식품’ 프레임은 실질보다는 상징에 집착한 대표적 사례였으며, 우리는 그 프레임의 위력과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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