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rium

album by Ellie Goulding

by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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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 가득했던 전진, 그러나 너무 과했던 욕심.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덕은 음반에도 해당된다.

메인스트림 팝으로의 엘리 굴딩의 본격적인 전진을 보여주는 Delirium은 그 볼륨에서부터 그녀의 어마어마한 야심을 느낄 수 있다. 스탠다드 트랙 수만 보아도 웬만한 디럭스 에디션 급인 16곡에 달하고, 디럭스 버전은 무려 여기에 여섯 트랙이 더해져 22곡이나 된다. (심지어 타겟 에디션은 이에 세 곡이 더해져 2CD로 분할되어 있다) 구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최고 히트곡이 되어준 “Love Me Like You Do”는 처음에 본 앨범 작업을 위해 거절했던 곡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여기에서도 한자리를 꿰차고 있고, 디럭스의 마지막 트랙으로는 (마찬가지로 전작의 보너스 트랙이었던) “I Need Your Love”를 잇는 캘빈 해리스와의 콜라보레이션 트랙 “Outside”가 자리하고 있다. 최대한 대량으로 때려 박겠다는 일종의 물량 공세 느낌이다.


그러나 본작이 양만큼이나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인지에는 의구심이 든다. 확실히 초반부의 기선제압은 뛰어나다. 전작 Halcyon의 느낌이 강한 인트로의 분위기를 확 반전시키는 오프닝 트랙 “Aftertaste”,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뛰어난 팝 넘버 “Something in the Way You Move”가 가하는 연타석 공격은 시원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단숨에 청자를 사로잡는다. 휘파람 소리가 다분히 아담 램버트의 “Ghost Town”을 연상시키지만 그럼에도 “Keep on Dancin’”은 기존의 엘리 굴딩에게 익숙한 이들이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할 흥미로운 댄스 트랙이고, 리드 싱글로는 살짝 모자랐던 “On My Mind”도 앨범 전체의 흐름에는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크하게 흘러가던 분위기는 지나치게 해맑은 “Around U”를 기점으로 확 깨져 버리며, 이후 중후반부의 트랙들은 대체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유달리 별로인 곡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 인상을 남기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나마 독특한 박자로 들어가는 훅이 시선을 끄는 “Don’t Need Nobody”, 포크 느낌이 첨가된 명랑한 “Lost and Found”나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댄스 그루브를 접목한 “Devotion” 등만이 확고한 개성을 드러내며 이 신나려고 만들어진 팝 앨범의 역설적인 지루함을 해소해준다. 그나마 하나 더 꼽자면 초반부의 화한 분위기를 다시 끌어오는 마지막 곡 “Scream It Out” 정도겠다. 디럭스에 추가된 곡들도 이런 힘든 상황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귀에 들어오는 인상적인 후렴은 “Paradise” 정도를 빼면 찾아보기 힘들고 “I Do What I Love”는 괴상한 가사까지 겹쳐 가히 2010년대 팝 역사상 그 어떤 곡과도 비견될 수 없는 끔찍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리저리 벌어진 판을 겨우 수습하는 마지막 트랙이 본인 명의의 곡이 아닌, 캘빈 해리스의 노래에 피쳐링으로 참여한 “Outside”라는 사실은 좀 애석하게도 느껴진다. 일관된 정서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추구한 각 트랙의 다변화가 그리 유의미한 결과를 맺지도 못한 셈이다. 차라리 과감하게 몇 곡을 빼버리고 10~12트랙 정도의 볼륨으로 밀도 있게 앨범을 구성하였다면 훨씬 더 근사한 완성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같은 해에 발매된 팝 앨범 중 칼리 레이 젭슨의 E•MO•TION이 80년대 복고를 지향하면서 장르로서의 “팝”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했기에 Delirium은 더욱 작아진다.


4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본 작품을 통한 본격적인 팝스타로의 변신 시도가 엘리 굴딩에게 가져다준 이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상업적으로 뛰어나게 성공한 것도 아니고 평단의 반응도 그냥저냥 전작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맥스 마틴, 그렉 커스틴 등의 거물 프로듀서들을 데려온 것 치고는 영 싱거운 결과다. 게다가 지금은 싱글 여러 개 내면서 간 보다가 운 좋게 1위 곡이 생기니 그때 서야 앨범 발매를 확정 짓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프랴. 그 와중에 그 히트곡은 본인의 오리지널 곡도 아니고 원곡과 판박이인 커버 곡이다. (*조니 미첼의 “River”.)


뭐, 굳이 의의를 찾아보자면 Delirium은 2010년대 중후반 앨범 트렌드의 어느 정도 선구자격 같은 존재다. 스트리밍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앨범 판매량 반영을 위해 (특히 힙합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트랙들을 대량으로 쑤셔 박고, 앨범과 연관 없는 프로젝트나 피쳐링으로 참여한 곡까지 수록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히트 싱글 하나 덕에 높아진 스트리밍 수치로 팬들이 기록을 세웠다느니 뭐니 하며 다투는 요즘을 보면 엘리 굴딩은 그때 한 다섯 수 정도는 앞서있던 것 같다. 물론 이게 좋은 의미라고는 할 수 없겠다.


(원 게시일: 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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