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택하면 벌어지는 일
싱가포르에서 마케팅 경력 8년 차가 되니 데이터 쪽으로 특화시켜서 실력을 쌓고 싶었다. 그때 그 분야에서 제일 유망한 스타트업이 싱가포르에 있었는데 그 곳과 자산총액 2위의 은행 OCBC Bank에서 함께 이직 제의가 들어왔다. 그 스타트업은 내가 가고 싶어서 지원을 한 것이고 은행은 그쪽에서 먼저 두배의 연봉과 컨슈머 마케팅 Asst. Vice President 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이고 하나는 돈을 많이 주는 일이다. 서울대 입학을 시켜준다고 해도 지방대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가겠다던 내가 이번에 돈을 택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깨달았다. 내 경력 15년 통틀어 그때 그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 세상에서 제일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는 것을.
이유는 단 하나다. 전망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것은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새벽까지 일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잠을 안 자도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하시는 것을 매일 보고 겪고 자란 나로서는 근면성실함은 내 뼛속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런 정신으로 열심히 배우려고 했다. 파이낸스라는 특화된 산업군에 VP로 들어와서 배울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걸 배워도 내가 마케팅의 정점으로 갈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은행의 특성상 개인정보 보안에 회사에 사활을 걸기 때문에 새로운 마케팅 제품이 나와도 쉽게 시도를 해볼 수 없다. 그렇게 놓치는 것들을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결국 나는 백수를 택했다. 6개월만 다녀도 3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보너스가 나오니 앞으로 3개월만 더 버티라는 친구들, 그만둬도 좋으니 갈 데를 좀 정하고 그만 두어라 하는 선배들을 뒤로하고 하루도 가슴이 시키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어서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를 내고 다음날 그 어느때보다 활기차게 이불을 박차고 기상을 했다. 나는 그때 삼수를 했던 때처럼 배낭에 책과 노트북을 넣고 공부를 하러 밖으로 희망을 품고 나갔다. 그렇게 나의 백수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