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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라윤 Oct 23. 2021

아빠가 200만 원을 빌려오셨다.

지금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 돈이 전부라고 하시며 주셨다.

나의 무능을 한탄하며 나 같은 놈은 회사원이 될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직서를 준비하던 그때 온 면접의 기회였다. 파견직으로 있으면서 비록 엉망이었지만 영어를 사용해야만 했기에 그 덕에 면접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싱가포르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부모님께도 싱가포르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며칠 뒤 조용히 나에게 200만 원을 건네주셨다. 아빠가 돈이 없어서 급하게 친구한테 빌렸다고 하시면서. 나는 부모님께서 나에게 돈을 주실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있는 돈으로 해결하고 부족하면 어떡하지 걱정은 되었지만 그렇다고 안 갈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다. 아빠는 특별히 다른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렇게라도 나에게 해주고 싶으셨나 보다. 자존심이 세고 가부장적인 우리 아빠가 나를 위해 남한테 돈을 꾸러 다니셨다는 것이 죄송하고 감사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책임감과 기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싱가포르로 가는 6시간 비행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어떤 모습으로 이 새로운 회사의 사무실에 첫 발을 디딜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계획과 다짐을 했다. 한편으로 예술가가 될 사람이 이렇게 회사원의 삶으로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인가 생각도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렇게 발을 디딘 싱가포르의 영어도 제대로 모르고 고군분투하는 나의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몇 개월쯤 지났을까. 한 번은 매니저가 지난달 총 impression (광고가 노출된 숫자)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 숫자가 바로 생각나지 않아서 확인해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그것도 모르냐면서 회사 한가운데서 아주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다. 그 매니저는 원체 팀원들 하나하나를 한 번은 울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래도 나는 절대 울지 않겠어 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만 제외하고 다들 한 번씩 울었는데 그날이 아마 내 차례였나 보다. 안 그래도 어떻게든 월급 받는 값을 하려고 악착같이 하루하루 살아나가고 있는데 그걸 누가 알겠는가. 힘들어도 회사 비상계단에 가서 울었으면 울었지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아마 한번 눈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뭐가 어찌 되어도 나는 결코 한 번도 눈물짓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버티기가 조금 힘들었다. 누가 나보고 너는 정말 코가 못생겼어 라고 해도 내 생각에 "이상하다. 나는 내 코 예쁜데?" 하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수 있다. 누가 너보고 바보라고 해도 "뭐야 지가 바보 아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의 어떤 점을 지적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비판과 칼날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회사 한가운데서 나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앉아 있으니 너무나 창피했다. 안 그래도 영어도 못 알아먹겠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답답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구먼 정말 세상이 나에게 너무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보 같으니 이렇게 대대적으로 혼도 나는구나. 자괴감도 들었다. 힘들면 아빠가 언제든 돌아와라 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사실 그 말이 내가 결코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는 두려울 게 없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깨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호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밥그릇을 챙겨야 하니 싸움닭처럼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일하고 공부하면서 싱가포르가 점점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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