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치안 문제> 기고글]
얼마 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을 그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관람했습니다. 이번 글은 영화 스포일러가 아닌 역사 속 지휘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선조 때인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무려 7년이나 계속된 우리나라에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긴 후유증을 남긴 전쟁으로, 절체절명의 국난 속에 빛을 발했던 이순신, 권율 같은 명장들의 뛰어난 지휘와 통솔력을 바탕으로 백성들은 끝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된 당시 임금 선조의 행적(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길에 오름)은 4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에게 그를 무능, 무책임한 왕으로 각인되게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도의와 애국심의 결여를 보여준 한 나라의 지도자를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사실 여러 가지 평가를 종합했을 때 선조가 객관적으로 아주 무능한 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선조의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적재적소에의 등용 때문입니다.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대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 인사는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임진왜란 발발로 인명피해가 극심하자 당시 천시받던 의학 분야에 첩의 소생인 천민 출신 허준을 적극 지원하며 '애민 의서'라 불리는 『동의보감』 편찬에 기여했던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가진 능력을 다 포함해서 보더라도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로서의 신임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조는 똑똑하고 편향적이지 않았지만 이기적인 리더의 반면교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책을 세우고, 엄격한 군 기강으로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을 갖추게 했으며,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을 갖춘 데다 오만불손했던 명나라 장수나 숙적인 일본 왜구도 감화시킬 정도의 인품을 가진, 가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라고 봐도 무방한 흠잡을 데 없는 성웅입니다. 다만 전쟁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던 원균과 조정의 모함이 아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원균을 보면 능력이 없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원균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따라 출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괜히 트집을 잡아 그를 모함하고 헐뜯어서 마침내 통제사의 자리를 빼앗았으나, 정작 자신도 해당 작전을 따르려 하지 않다가 곤장을 맞고 난 후 억지로 출정했다가 조선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비합리적인 작전을 주장하며 군 지휘권을 얻고, 결국 그 작전을 시행하다 참패한 전략적 무능은 물론 지형을 읽는 능력도, 정찰을 게을리 않는 치밀함도,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까지 죄다 낙제 수준인 데다 뛰어난 동료를 모함하고 뇌물, 아첨, 인맥으로 출세를 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던 최악의 자질을 가진 장수였습니다.
한편 최근 경찰국 신설과 함께 초대 경찰국장에 이어 경찰청장이 정식 임명되었습니다. 경찰 조직을 이끌 새로운 리더들이 공개된 후 경찰국 신설 적법성 여부에 대한 야당의 반발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되거나 과거 밀고 행적 의혹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때로 치면, 전쟁터에 나가 적의 목이나 코를 베어 그 수를 헤아려 승진을 하는데 지휘관이 무고한 백성이나 아군까지 참하여 전공을 부풀렸었다는 식의 무서운 소문이 들리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공명정대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우리의 리더는 과연 어떻게 이 불안과 혼란을 타개해 나가실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14만 경찰의 한 일원으로서 앞으로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